연재기획 | 터키 2) 터키인

터키에서의 열흘. 짧고도 아쉽게 여행이 끝났다. 여행을 마침과 동시에 터키에 다시 꼭 오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빡빡한 여정의 배낭여행이 녹록지 않았건만, 터키를 다시금 찾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단지 아름다운 자연, 소름 돋도록 장관이었던 유적지들을 다시 보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보다 터키에서 만난 터키인들이 왠지 모르게 애당겼기 때문이다. 여행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 때문에 잊을 수 없도록 맘속에 새겨지는 것이 아닐까.

터키에서 만난 터키인들은 따뜻했다. 몇 마디 한국어, 능통한 영어를 구사하는 관광지를 벗어나보면 더 그랬다. 우리는 종종 터키어를 한 마디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길 잃은 여행객이 됐지만 그때마다 터키인들은 친절하게도 온갖 수단을 사용해 우리에게 길을 알려주었다. 짧은 시간인만큼 ‘모든’ 터키사람 혹은 ‘일반적인’ 터키사람을 다 느끼기란 불가능했지만, 입시에, 취직에 쫓기며 지내는 우리들 눈엔 그저 부러웠던 터키인들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터키는 터키다

터키인들에 관해 한번쯤 고민해 볼 주제는 그들이 동양인인가, 서양인인가 하는 것이다. 아시아지역에서 기원한 조상의 후손이지만, 유럽국가로 볼 수 있는 오스만 제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오스만 제국 때 이뤄진 본격적인 ‘서구화’ 과정은 결국 아시아인(동양인)의 기질을 갖고 서양인의 외모를 닮은 지금의 터키인을 낳게 했다. 그들의 종교 역시 서양과 동양을 나누는 데 있어 문제가 될 수 있다. ‘서양’의 종교와 달리 현재까지 터키의 종교는 이슬람교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첫눈에 터키인들은 지극히 ‘서양적’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만나는 사람마다 당신은 동양인 인지 서양인 인지를 물었다.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우리는 아시아인이다. 하지만 점점 서양인이 돼 가고 있다”고 답했다. 그들의 말처럼 터키 곳곳에서 ‘서구화’를 지향하는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선진국’반열에 들어서고 싶어서일까? 이스탄불 곳곳에서는 ‘The most European city, Istanbul’이 홍보용 슬로건으로 적혀있었다. ‘가장 유럽적인 도시’란 문구를 보며 ‘유럽에 편입되고 싶은’ 터키가 보였다. ‘톰 크루즈’는 ‘월드스타 톰 크루즈’라고 할 필요가 없이 그냥 ‘톰 크루즈’인 것과 비슷한 논리로 말이다.

하지만 터키가 진정 매력적인 이유는 딱 부러지게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동양적’이면서도 ‘서양적’인 오묘함이다. 혹은, 그 모든 색깔들을 초월한 터키는 ‘터키색’일 수도.

관광하러 간 곳에서 관광을 당하다!

“우리 같은 페이스는 터키를 가야된다니까!” 터키를 먼저 다녀왔던 친구가 했던 말이다. 실제로 터키를 가보니, 친구 말에 동감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에서 기원한 종족을 조상으로 하는 터키인들이기에 ‘피가 당겼던’것일까? 터키 사람들의 동양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정말 뜨거웠다. 터키는 전역이 세계적인 관광지이지만, 지리상의 여건이 좋은 유럽인들이 가장 많이 찾고 우리와 같은 ‘페이스’를 가진 동양인은 눈 씻고 찾아야 겨우 볼 수 있는 정도였다. 그조차도 관광지를 약간만 벗어나면 까만 눈동자를 가진 우리 같은 얼굴은 아예 없다시피 했다.


▲ 데이트를 즐기는 이스탄불의 한 커플

이런 희소성(?) 덕분인지 터키인들은 동양인을 신기해 했다. 이렇게 신기해 하는 감정에는 다분히 호(好)의 감정이 섞여 있었다. 머지않은 과거에 우리가 백인을 쳐다보고 관심 갖는 정도랄까. 관광하러 온 건데, “안녕하세요”, “곤니찌와”, “니하오” 서툴기만 한 삼국의 인사말을 수도 없이 들으며 여행 내내 기분 좋은 ‘역(逆)관광’을 당했다. 갑자기 쏟아지는 관심을 받으니 피곤하기도 했지만, 이런 모든 것이 어디서도 느껴보기 힘든 터키만의 매력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슬람교, 쿨하지 못해 미안해

터키 국민의 99%이상이 이슬람교를 믿는다하여 이슬람색이 짙은 아랍의 국가들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스탄불과 같은 큰 도시에서는 히잡을 두른 여자들도 보기 힘들었고, 연인끼리 데이트하는 모습도 우리와 다를 바 없었다. ‘종교와 정치를 분리한다’는 세속(世俗)주의 하에 터키만의 ‘개방적인 이슬람교’가 탄생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서구화 될 지라도 유교의 틀을 벗어나기 힘든 것처럼, 터키의 이슬람식 모습들을 ‘쿨하게’ 종교에만 한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아 보였다. 터키에서 가장 신기했던 건, 서비스 직종에 종사하는 여자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상품을 팔고, 음식을 팔고, 차를 끓이는 등의 모든 서비스 성격의 일들은 남자들이 했다. 이뿐 아니라, 여행객인 우리에게 먼저 말을 붙이고, 호객행위를 하던 사람들 모두 남자였다. 그래서 아쉽게도 터키의 여성들과는 얘기해볼 기회가 적었다.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여성이 먼저 낯선 사람에게 다가서는 행동들을 부도덕함으로 여기는 걸까?


▲ 친해지고 싶었으나 다가가기엔 멀었던 히잡을 쓰고 있던 터키의 여성들

특히 도시가 아닌 작은 시골에서 더욱 남성 중심적인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시골일수록 히잡을 쓰지 않은 여자들은 없었다. 농촌의 히잡을 쓴 여성들은 낯선 모습의 우리가 신기할 법도 한데,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또한 차를 팔며 마작과 같은 놀이를 즐기는 찻집에는 남자들만 있었다. 그곳이 궁금해 들어가보려 했지만, 남자들의 따끔한 눈초리에 움츠러들어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답답해도 부러운 터키타임

‘빨리빨리’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터키타임’은 가장 적응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느긋한 터키인들의 모습은 빨리빨리 척척 해내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우리에게 ‘게으르다’고 비춰지기 십상이다. 공항에서의 티켓팅, 은행에서의 환전, 심지어 마트에서의 계산조차 빠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상황을 답답하게 느끼는 사람도 한국인 뿐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터키인들의 ‘느릿함’은 답답했지만 한편으론 그들이 정말 부러웠다. 터키인들은 평소 우리가 행하기 힘든 여유를 즐겼다. 그들은 저녁 6시쯤이 되면 관광지를 제외하고는 하나 둘 씩 하루 일을 마친다. 그러곤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거나, 이스탄불처럼 바다가 있으면 바다로 나와 유유자적 낚시를 즐긴다. 터키의 지하철 속 풍경도 여유롭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의 지하철이라면 이어폰을 꽂고 전자기기를 만지작거리거나, 쫓긴 잠을 자느라 바쁠 텐데 터키의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단 한명도 ‘서울식 승차’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말똥(?)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볼 뿐, 피곤한 사람도, 졸린 사람도,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터키인들은 우리나라의 한강의 기적, 괄목할 만한 경제적 성장과 같은 스토리에 딱히 동요하지 않는다. 그보단 그들이 그들의 땅에서 누리는 자연과 문화, 삶 자체를 정말로 사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을 보며 행복해지려고 사투를 벌이지만 결국 행복해지지 않는 우리가 보였다. 결국 여유롭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면, ‘GDP 3만불 달성’등이 뭐 그리 대단한 목표일까.


▲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를 올리는 터키인들

한국과의 인연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로 여겨진다. 아시아 대륙의 동과 서에 위치한 두 나라가 형제의 애를 맺게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한국전쟁 때 그들이 우리를 도와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터키와 우리와의 인연은 한국전쟁 그 훨씬 이전부터 시작된다.

우리역사 속에 ‘오랑캐’로 묘사돼 등장하는 흉노(匈奴), 돌궐(突厥)이 터키인의 조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고조선시대에 흉노는 우리와 동맹 관계를 맺었던 이웃 민족이었다. 곰을 수호신으로 여기는 우리처럼 같은 토템을 가진 민족이기도 하다. 고구려와 돌궐도 동맹의 인연을 맺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우애를 다졌던 두 민족이 서로 떨어져 지내다, 한국전쟁을 기점으로 다시 만난 것이다.

실제로 자신의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참전했다며 한국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에페스에서 만난 자신의 아버지가 한국전 참전용사라는 터키인은 우리가 한국인임을 알고서는 “We are brothers!”를 외치며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하지만 터키의 젊은 사람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처럼 한국을 끈끈한 형제의 애를 나눴던 나라로는 기억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전우의 지인이 아니고서는 말이다. 상술로써 ‘형제의 나라’를 사용하기도 했다. 오히려 ‘한국’하면 ‘형제의 나라’보단 너나할 것 없이 2002년의 한일월드컵에서 터키와 우리가 3,4위전을 치렀던 순간들을 기억했다.

우리가 방문했던 열흘 간의 시간은 특히나 터키인들을 잘 알 수 있었던 기회였다. 바로, 2010 남아공월드컵의 준결승전, 결승전 등 막바지의 경기들이 한창 치러지는 때였기 때문이다. 이번 2010년 월드컵에 출전도 못한 터키였지만, 터키의 축구애(愛)는 놀라울 만큼 뜨거웠다. ‘대형스크린 있음’ 등의 문구가 걸려있는 식당에 모여 우리의 응원과 비슷한 방식으로 응원을 즐겼다. 모두가 퇴근할 시간이었지만, 축구경기가 열리는 날 만큼은 거리가 북적였다.

‘남의 축구’도 이렇게나 사랑하는 그들을 보며, 48년 만에 터키가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2002년 여름을 상상해 보았다. 그들은 머나먼 땅 한국에서 펼쳐지는 경기에서 한국 서포터즈들의 터키응원을 보며, 한국 관중석에서 함께 펼쳐졌던 터키 국기를 보며, 터키와 한국 선수들의 어깨동무를 한 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터키인들에게 ‘한국인’하면 바로 ‘2002년’을 떠올리게 할 만큼, 터키인들이 느낀 그때의 감동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는 듯 보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지만, 거부할 수 없는 끈끈한 정이 느껴졌던 매력적인 터키 사람들. 2002년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던 것, 승패를 떠난 감동적인 경기를 치른 것 이 모두를 터키인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터키와 우리는 언제고 다시 만날 운명의 친구, 소울메이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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