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의문 가운데 하나. 왜 사람들은 영화를 보자마자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영화를 보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영화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이상한 것은 누구도 문학작품을 읽은 후, 현대 미술을 감상한 후, 클래식음악을 감상한 후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떠들기는커녕 조용히 곱씹으며 음미한다. 왜 이런 것일까? 아마도 영화가 다른 장르에 비해 이해하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게다가 스타가 나오기 때문에, 그와 쉽게 동화되어 그의 심리를 비롯해 (영화 내용은 물론)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

나는 지금 ‘착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 착각이다. (그 영화의 감독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방금 본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기억할 수는 없다.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장면만 기억할 뿐이지만, 자신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때문에 마음대로 재단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런 자신감이 문학에는, 음악에는, 미술에는 없지만 영화에는 있다. 이것은 영화의 축복인가, 저주인가? 축복이라면 그만큼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고, 저주라면 왜 사람들이 영화는 보면서도 비평은 읽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비평이 일찍부터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사 전체를 보면 영화평론은 그리 즐겨 읽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1990년대 이후 지난 20년간의 영화비평의 흥망성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분명 1990년대 초중반에 일어나서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던 영화비평의 전성기가 존재했지 않는가? 한 영화 주간지가 10만부의 판매고를 기록했고, 그래서 영화 주간지가 세 개가 되었으며, 월간지도 세 개나 동시에 존재했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일간지의 많은 지면을 영화평론가의 글로 메웠으며 방송에서도 수시로 평론가가 등장해 영화에 대한 지식을 전수하기에 바빴던 시절이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보면 오히려 그런 시절이 예외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비평이 일찍부터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비평에 관심이 있었던 이들의 전유물이었고, 범위를 넓혀도 약간의 ‘먹물’을 먹은 이들이 찾았던, 극히 제한된 영역의 산물이었다. 특이하게도 거시적 변혁 운동이 사라진 자리에 미시적 변혁 운동의 대명사처럼 영화가 등장하고, 이후 숱한 학문의 집합체로 영화비평이 화려하게, 그러나 서구에 비해서는 매우 늦게 등장하면서 1990년대 초반부터 몇 년 동안 바람이 거세게 불었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이 역시 서구의 흐름을 뒤늦게 받아들인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환경이 변화했기 때문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렇게만 정리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이런 시각은 평론가의 자위적인 해석에 그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복잡한 현대사회에서는 절대로 하나의 현상이 하나의 원인 때문에 발생하지는 않는다. 영화평론이 힘을 잃은 이유에 대해 많은 이들이 지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환경이 변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인터넷으로 정보를 접하는 젊은 세대들이 늘어나면서 종이신문이 예전의 위력을 잃은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맞는 말이다. 예전의 종이신문을 보던 ‘일방향의 독자’ 시대에서 이제는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는 ‘쌍방향의 네티즌’ 시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네티즌 가운데에는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는 이들이나 상당한 예술적, 인문학적 지식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이들이 자신의 블로그와 미니홈피를 통해 영화에 대한 명민하고 예리한 분석을 내놓아 네티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특정 장르에 대한 마니아들이 모여 마치 경전처럼 특정 영화를 논의하면서 치밀하고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에 비하면 영화평론가들의 비평은 고루하거나 깊이 없는 글로 보이기 십상이다(그리고 이것은 현실이 되었다). 게다가 디지털 세대는 영화를 보는 것은 즐기지만 영화에 대한 진지한 글을 읽는 것은 그리 즐기지 않는다. 영화홍보사에서 평론가의 글보다는 네티즌들의 입소문과 그들의 별점에 더 주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제 평론가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시대가 된 것인가?

환경이 변한다고 해서 평론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영화평론은 두 가지 면에서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믿는다. 먼저 자문자답. 평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작품의 장단을 짚어주고 작가의 작품세계를 분석하며 영화사(映畵史)의 위치에서 그 작품을 자리매김하는 작업이다. 영화가 존재하는 한 이런 작업이 사라질 수는 없다. 그렇다면 평론가 개인적 입장에서 영화평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만의 영화 사랑 방식이다. 영화를 진정으로 좋아하면 같은 영화를 두 번 보게 되고 이후 그 영화에 대한 평을 쓰게 된다는 프랑수아 트뤼포의 말은 분명 맞는 말이다. 때문에 환경이 변한다고 해서 평론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평론과 독자의 만남이 더 유용해진 면이 있다

그렇다면 디지털 시대에 평론가들은 어떤 길을 가야 할 것인가? 첫째, 평론가들은 디지털이라는 환경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 디지털이라는 환경을 잘만 활용하면 오히려 단점이 장점이 될 수도 있다. 가령 인터넷에 들어가면 특정 영화에 대한 거의 모든 글을 읽을 수 있다. 과거에 썼던 글도 그대로 남아있다. 종이신문은 직접 찾아서 스크랩을 하거나 복사를 해야 하지만, 인터넷은 그렇지 않다. 때문에 한 번 써 놓은 글은 언제든지 쉽게 독자들과 만날 수 있다. 게다가 그 가운데 잘 썼다고 생각되는 글은 네티즌들에 의해 삽시간에 ‘퍼날라진다’. 그래서 오히려 평론과 독자의 만남이 더 유용해진 면이 있다. 물론 이런 글들은 대부분 분량이 얼마 되지 않고 학술적이지도 않지만, 단문을 통해 핵심을 짚는 인상비평도 영화비평에서 중요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앞으로 이런 비평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영화 자체만 이야기하지 다른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디지털의 이런 환경과는 반대로) 영화를 중심에 두는, 제대로 된 깊이 있는 영화비평을 해야 한다. 영화평론이 불신 받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영화에 대한 글을 쓰는) 파워블로거들이 많이 등장한 것도 한 원인이다. 그러나 그들의 글은 한계를 지닌다. 특정 장르 마니아들은 그야말로 특정 장르, 그것도 특정 시기의 영화만 좋아하고 그 범위를 벗어나면 곧 지식의 한계를 드러내고 만다. 파워블로거들 역시 자신들의 인문학적 지식에 기댄 글을 쓰고 있어 영화 자체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과 해석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 부분에서 시사하는 것이 있다. 작년에 출간한 정성일의 책이 영화비평집으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판매고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이미 발표한 글을 모은 것이고, 그것도 인터넷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는 글임에도, 더군다나 현학적이기로 유명한 그의 글임에도 많은 판매고를 올린 것은 그만이 쓸 수 있는 글, 즉 영화에 대한 박학한 지식과 한없는 애정, 영화이론과 영화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 영화테크닉에 대한 철학적·미학적 사유, 작가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 동시대 영화 흐름에 대한 지적 고민 등이 풍부하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 자체만 이야기하지 다른 것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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