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1) 르네상스 인문주의

산을 오르는 사람에겐 두 부류가 있다. 산을 ‘정복’하려는 자와 자신을 ‘반성’하려는 자. 전자는 왜 오르느냐는 질문에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라고 답한다. 이들의 불타는 투지욕은 “너 소? 나 최영이야!”를 외치는 과거 송강호식 개그를 닮았다. 반면 후자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의 교차라는 은유를 통해 굴곡진 삶을 겸허히 수용하는 법을 배운다.

그런데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평지를 뛴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 아마도 철없이 뛰노는 어린애이거나 산을 평지로 깎는 ‘삽질신공’의 달인 둘 중의 하나일 게다. 분명한 건 그가 대상에 대한 관조도, 자신에 대한 반성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말년의 대비가 없는 자에겐 비극만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역사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하늘의 권위를 빌려 평지를 내달렸던 중세 교회의 전성기는 도처에서 발생하는 도전자들의 반항으로 인해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종교개혁과 농민반란은 그 신호탄이었다. 성서의 대중적 번역으로 ‘신앙적 구원’의 개인적 길이 열리자, 부정한 교회의 비난을 넘어 새로운 ‘천년왕국’의 도래에 대한 갈망은 점차 내전의 양상으로 치달았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반발의 지역적 차이다. 유럽대륙은 신교의 교세확장으로 구교와의 충돌이 불가피했지만, 영국은 헨리 8세의 수장령으로 일찌감치 종교논쟁을 접은 뒤 경제와 정치문제에 매달렸다. 이러한 차이는 이후 사색의 흐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대륙의 합리적 전통과 영국의 경험적 전통이 그것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양쪽 다 신의 보증을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의 보증이 없다면 해결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 점이 남는다. 우선 신의 피조물로 지상에서 으뜸을 차지했던 ‘인간’을 새롭게 규정해야 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신학의 시녀로 자임하면서 현학적인 궤변만 일삼던 스콜라 철학을 대치하는 역할은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의 몫이었다.

그리고 북이탈리아는 지중해 무역을 통한 경제적 성장과 이를 바탕으로 한 메디치가의 재정적 후원으로 그들의 주요 무대가 됐다. 그들의 인간관은 무엇일까? 피코 델라 미란돌라는 신의 입을 빌어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다른 피조물들의 본성은 결정되고 제한된다. 하지만 너(인간)는 네 자신의 자유의지로 네 본성의 특징을 만들어라!”

그러나 자유의 몸이 된 인간이 파악해야 할 특징은 자기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삶의 터전인 ‘자연’은 이제 “있으라!”하는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아니라 관찰과 분석을 기초로 하는 인간의 이성(로고스)에 의해 해명되어야 했다. 때마침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촉발된 ‘천상’의 혁명이 ‘지상’으로도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이 ‘혁명’적인 이유는 단지 모든 자연으로 자신의 관심을 확대했다는 점 못지않게 이러한 탐구의 방법론을 정교하게 고안했다는 점 때문이다. 지나친 실험정신으로 목숨을 잃은 베이컨은 그 유명한 ‘꿀벌의 비유’를 통해 귀납적 원리를 중시했다. 반면 그보다 세 살 아래인 갈릴레이는 자신이 직접 제작한 망원경으로 지동설을 뒷받침할 정도로 경험을 중시했지만, 수학적 증명과 같은 연역적 원리에 더 비중을 두었다.

문제는 이러한 두 원리가 서로 충돌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영역을 넘어 철학 전반에 걸쳐 대립하는 두 진영을 낳았다. 합리론과 경험론이라는 철학의 두 흐름은 이렇듯 대립과 반목, 교류와 영향을 미치며 근대의 토양을 다져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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