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주제, 다른 생각 - 동상이몽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굳이 누군가에게 배우지 않더라도 경험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같이 살고 있는 가족,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 대학에 들어와 알게 된 사람들,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나게 된 사람들 등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사회적인 삶을 살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인 삶을 살아야 하지만 그 삶 속에 즐거움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인간관계에 치여 피로함을 느끼기도 한다.

이런 피로함을 느낀 사람들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휴식을 취한다. 보고 싶던 영화나 드라마를 혼자 몰아서 보기도 하고 한번쯤 가보고 싶었던 곳으로 훌쩍 떠나기도 한다. 자신의 취미생활에 몰입하거나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낼 때도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잠시 쉬었다 다시 사람들 속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정말로 지쳐버려서 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가서 자신만의 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없는 장소에서의 생활은 현대인만이 꿈꿨던 것은 아닌가 보다. 18세기의 영국작가 다니엘 디포 또한 이런 상황을 상상했었다. 물론 소설 속 주인공이 스스로 원해서 무인도로 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니엘 디포가 쓴 <로빈슨 크루소>와 20세기에 미셸 투르니에가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해 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하 방드르디)을 통해 타인과의 만남이 제한된 무인도에서의 생활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한편 주인공이 무인도에서 예상치 못하게 만난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인간관계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도 있다.

<로빈슨 크루소>는 항해 중 폭풍우를 만나 조난당한 ‘크루소’가 무인도에 떠밀려와 28년간 생활하다 탈출하는 이야기다. 모든 일을 혼자서 해야 하니 힘들기도 하고 대화할 사람도 없으니 심심할 텐데 크루소는 지치지 않고 열심히 생활한다. 거주할 요새를 만들고 농사를 짓기도 한다. 그렇게 생활하던 중 우연히 식인종 무리에 잡혀있던 흑인 한 명을 구해주게 된다. 자신을 구해준 크루소를 잘 따르는 흑인에게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빵과 옷을 주며 친절하게 대해준다. 또한 종교를 포함해 자신이 알고 있는 문명을 전해준다.


이 둘의 관계는 어떤 관계일까.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협력하는 동반자일까. 아니다. 프라이데이는 크루소의 하인이다. 크루소가 자신을 구해줬기 때문인지 아니면 총이라는 무기를 갖고 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라이데이는 크루소를 주인으로 모신다. 크루소는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프라이데이로 대표되는 야만인들이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로 그와 프라이데이의 주종관계를 간단히 합리화한다. 프라이데이가 자신과 똑같은 능력, 이성, 애정, 감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프라이데이뿐이 아니다. 크루소에게 프라이데이를 포함한 무인도의 모든 것은 자신이 관리하고 지배하고 개발할 야만일 뿐이다. 대지와 동식물, 야만인,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 그 무엇도 크루소에게 의미 있는 타인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타인과의 온전한 관계를 갖지 않았기 때문에 크루소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혼자 살면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한편 <방드르디>에 등장하는 크루소는 약간 다른 길을 걷게 된다. 섬에 표류하고 개척생활을 하다 흑인을 구해주는 장면까지는 비슷하게 진행된다. 크루소는 자신이 구해준 흑인에게 ‘방드르디’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자신이 알고 있는 문명을 가르친다. 그런데 방드르디는 프라이데이와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다. 방드르디는 처음에는 순종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서서히 크루소가 만들어낸 문명의 질서를 하나하나 파괴하기 시작한다.

어느 날 방드르디가 던진 담배가 화약통을 터뜨리면서 크루소가 구축했던 모든 것들이 허물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힘들게 만들었던 모든 것이 사라져서 였을까. 그날 이후로 크루소는 크게 변해 방드르디의 원초적인 삶에 동화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주변 것들을 문명화시키려하는 대신 같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호흡하는 법을 익힌다. 대상물로서의 객체가 아닌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는 타인으로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것이다.

타인은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흔한 말처럼 크루소는 방드르디를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믿고 신봉해왔던 문명이 완전하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자유로운 방드르디의 삶 속에서 기쁨, 희망, 생명력 같은 긍정적인 가치를 배우면서 진정한 자신을 만들어 간다. 방드르디를 통해 온전한 자신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누구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자신일 것이다. 자신이 아닌 타인과의 만남은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상처를 준다. 그러다 보면 한 번쯤 나에게 있어 타인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된다. 이럴 때 두 명의 크루소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고민을 풀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