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3) 대륙의 합리론 2

일본을 강타한 지진의 후폭풍이 가라앉기는 커녕 더욱 커지고 있다. 원전 폭발로 인한 방사능 누출의 공포가 그 주범인데, 지금 세계는 예측 불가능한 사태의 두려움으로 공포에 떨고 있다.

때문에 언론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아포칼립스’(apocalypse)란 단어는 더 이상 은유적 표현이 아닐지도 모른다. 원래 ‘드러내다’를 뜻하는 Apokalyptein에서 유래한 이 말은 신약에서 사도 요한이 천사로부터 받았다는 종말의 ‘계시’와 중첩되면서 오늘날 ‘대재앙’을 통칭하는 용어로 종종 취급된다. 그래서인지 언어유형학에 심취한 한 대형교회 목사는 작금의 사태를 ‘종교적 심판’으로 규정하고 싶은 모양이다. 그가 염원했다던 한국의 ‘영적 지진’은 뜻하지 않은 한기총 ‘해체’운동으로 가시화되는 중이다.

재난을 대하는 또 다른 태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연발하는 정부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다. 이제껏 발생한 지진 진도가 6도 미만이고 우리 원전이 6.5도에 내진설계 되어 있으니 안심하라는 주장은 일견 과학적 분석과 논리적 추론의 진리로 보인다.

하지만 사후에 관측될 뿐인 진도를 감안할 때 내진설계의 구체적 수치를 맹신하는 건 마치 시한부 종말론이 점치는 구체적 날짜와 다를 바 없다. 믿음의 공통분모에서 양자가 구별되는 차이는 대상이 인간이냐 신이냐 하는 데 있을 뿐. ‘신에 대한 경외’와 ‘인간의 오만’이 대안이 아니라면 제3의 길은 없을까? 오늘 논할 주인공이 어쩌면 그 길의 훌륭한 안내자가 될 수도 있겠다.

바루흐 스피노자. 통상 철학사에서 합리론의 범주에 묶이지만 그 자신은 부단히도 그 틀을 깨려고 애썼던 인물. 그래서일까? 시인 노발리스는 그를 ‘신에 취한 사람’이라 불렀다지만 오늘날 네그리는 자신의 저서에서 “스피노자는 별종이다!”라고 외친다. 이러한 극단적 평가는 물론 스피노자 자신의 저서에서 연유한다. 하지만 그의 삶도 이에 못지않게 극적이었다.

이름처럼 ‘축복’(바루흐)속에서 태어난 스피노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축복해준 유대교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파문결정문의 구절은 그들의 광기를 짐작케 한다. “스피노자를 저주하고 제명하여 영원히 추방한다. 잠잘 때나 깨어있을 때나 저주 받으라!”

교회는 ‘신 또는 자연’이란 그의 표현에서 범신론적 혐의를 발견하고자 했다. 어떻게 전능한 신성을 하찮은 피조물조차 갖는단 말인가? 유한실체들로 확대한 데카르트조차 신이 아끼는 인간의 사유 실체가 우위에 있음을 전제함으로써 기계적 자연의 지배를 명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이야말로 자기-원인적 실체의 정의에 더 충실한 결과였다.

무한한 신이 자기 ‘밖’의 피조물을 창조함으로써 스스로를 ‘제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유한’ 실체란 말은 그 자체 형용모순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세계에 존재하는 유한한 것들은 다 뭐란 말인가? 스피노자는 ‘실체’와 그것의 변용인 ‘양태’라는 도식을 통해 변화무쌍한 현실을 구제하고자 했다. 물론 이때의 실체, 즉 신은 일종의 내적 원리가 되겠지만.

사실 교회나 데카르트의 속내는 ‘성’과 ‘속’의 단절에 있다. 이를 통해 각각 ‘신의 권능’(과 대리인인 교회의 권력)과 ‘인간의 자연지배’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반면 스피노자의 실체는 존재의 위계를 거부하고 관계의 회복을 요구한다. 조화로운 원리의 깨달음은 오만과 공포가 주는 상상력의 망상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지성의 성찰과 평정에서 가능한 것이다.

‘신의 저주’와 ‘원자력 르네상스’가 판치는 지금, 냉정한 사태파악을 위해 스피노자를 읽는 것은 어떨까? 우리뿐만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해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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