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어주는 남자


지금, 정병근의 시에서 『희망』이란 제목과 마주할 수 있음은 천만다행인 일이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어린 당신’에게,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아이’에게 바쳐지고 있다. “나를 일찍 여읠 어린 상주여”라고 ‘아이’를 부르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듯 일종의 유언 형식을 띠는 작품이라 할 수 있지만, 설사 ‘내’가 죽는다고 하여도 목 놓아 울 필요는 없다. ‘나’는 그 슬픔을 예비하여 ‘아이’를 “울음이 잦은 서자(庶子)”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아이의 어미를 “편모슬하의 계모”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순전히 비극을 그려내기 위해 상상했을 사후의 가계도이지만 그 모습은 매우 단란한 형국이다. ‘나’는 그러한 모습을 죽음 너머의 세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저녁이 되면, 죽은 ‘나’와 ‘어린 당신’ 그리고 ‘아이’가 밥상머리에 “등을 모으고” 식사를 하고 있으니 죽어서도 어찌 행복하지 않은가.

오늘도 “그 집”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게다가 언젠간 죽어갈 이 세상의 많은 ‘아비’들의 무거운 어깨를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지만 가부장적 사회의 숙명이라고만 말해두고 다른 너저분한 말들은 삼가도록 하자. 정병근은 죽음이 곧 희망이라는데 더 이상의 말이 무엇 때문에 필요하겠는가.

박성필(교양교직부 글쓰기교실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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