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3) 대륙의 합리론 3

1755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발생한 엄청난 지진과 해일을 복기하면서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자신의 소설 『캉디드』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이것이 가능한 최선의 세계라면 다른 세계는 도대체 어떤 곳이란 말인가?” 그의 항변이 더욱 절절하게 보인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그날이 성인을 추모하는 만성절이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볼테르의 조롱기 섞인 원망이 향한 곳은 ‘하늘’이 아니라 정확히 ‘지상’이었다. ‘낙관주의’란 그 책의 부제가 말 해주듯 그의 타깃은 낙천적 사유로 유명했던 당대의 철학자, 라이프니츠였다.

지긋지긋한 30년 전쟁의 포성이 멈출 무렵, 라이프니츠는 독일 라이프치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집안의 학문적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라이프니츠를 사색의 길로 안내했다. 순전히 어린 나이 때문에 박사자격을 거부당했다는 일화는 그의 박식함과 조숙함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해준다. 심지어 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대제는 그를 일컬어 ‘대학 그 자체’라고 불렀다는데, 백과전서 편찬에 20여 년의 공을 들인 볼테르와 그의 친구들이 그를 비난한 데에는 아마도 약간의 질투심이 있었으리라.

라이프니츠의 낙천적 기질을 더욱 부채질한 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냈던 프로이센의 정계였다. 그러나 외교특사, 경제고문, 역사편찬, 선교담당 등으로 분주하게 유럽 전역을 오간 라이프니츠의 관심은 정작 다른 곳에 있었던 듯하다. 본연의 임무가 실패로 귀결되는데 비례해서 그의 학문적 열정과 성취는 더욱 더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기하학, 미적분, 보편기호학과 같은 수학적 결실과 더불어 존재론, 인식론, 논리학에서의 업적은 여행에서 만난 학자들과의 교류가 그에게 안겨준 선물이었다.

하지만 다식(多識)이 저절로 박학(博學)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나친 앎은 그 깊이를 박(薄)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일까? 주체 못할 지식의 확장을 체계로 포괄하는 과정에서 보인 그의 시도는 조금 무모해 보인다. 실체에 대한 규명이 대표적이다. 무한히 쪼개질 수 있는 함량미달인 연장적 존재를 배제함과 동시에 유일실체라는 단순한 가정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질문의 답은 간단하다. 실체를 정신적 존재에 국한시키되 그런 존재가 무수히 많다고 보면 되니까. 이것이 바로 저 유명한 ‘모나드’론이다.

이로써 세계는 자족적 모나드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그런데 자족적이라면 모나드 간의 관계는 어떻게 맺어진단 말인가? 세상은 소통과 교류 속에서 끊임없이 유동하지 않는가? 라이프니츠는 어차피 모나드가 질서를 품은 소우주적 존재이기에 관계란 불가능하다고 보았지만 현상적으로 보이는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해명할 필요를 느꼈다. 많은 악기들로 구성된 교향악단을 보라. 각자는 자신의 연주를 하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롭지 않은가? 그것은 악보 혹은 지휘자 때문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우주의 지휘자는 세상을 조화롭게 예정한 신이었다.

볼테르가 발끈한 대목이 바로 여기다. 신이 최선의 세계를 창조했다면 도처에 있는 악은 뭐란 말인가? 모든 것이 존재 이유를 갖고 악조차 선을 위해 봉사한다는 낙관론자의 변호는 그로 하여금 소설 속 경멸의 인물을 만들게 했다. 소설의 마지막 구절을 보자. 경험론의 예고편이 여기에 실려 있으니까. “최선의 세계에서는 모든 사건들이 연계되어 있네. 만일 자네가 (…) 남작을 칼로 찌르지 않았더라면, 또 엘도라도에서 가지고 온 양들을 모두 잃지 않았더라면 자네는 여기서 설탕에 절인 레몬과 피스타치오를 먹지 못했을 것 아닌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밭을 갈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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