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5) 영국의 경험론1

대륙에서 30년 전쟁이 한창일 무렵 그나마 유럽에서 상대적인 안정기를 보낸 곳이 있다면 영국을 꼽을 수 있다. ‘상대적’이란 표현을 쓴 이유는 영국이 국제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뜻이지, 갈등 없이 평화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찍이 로마 가톨릭과 선을 긋고 출발한 영국국교는 왕권의 강력한 버팀목 아래서 사회 통합의 역할을 수행하는 듯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대륙에서 불어오는 종교개혁의 열풍과 군주와 의회간의 갈등은 수습 불가능한 내전을 불러왔고 마침내 의회의 승리를 부른 ‘명예혁명’으로 일단락됐다. 혁명의 핵심세력은 청교도들이었는데, 탄압에 실물이 난 일부는 일찌감치 ‘메이플라워’호에 올랐지만, 남은 이들은 여전히 암중모색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메리카로 떠난 신교도들이 의회체제의 정치적 기틀을 잡는데 힘을 쏟았다면, 국내의 체류자들은 왕당파의 군주주의 전통과 싸우면서 새로운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야하는 역할을 떠맡았다. 그러한 적임자로 누가 가장 좋을까? 청교도적 배경에 내전 당시 의회군에 복무까지 한 집안이라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스피노자와 동년배인 존 로크가 자신의 고유한 사상적, 정치적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배경이 놓여 있었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영향에서 출발한 그 둘은 대륙과 영국이라는 상이한 토양 속에서 전혀 상반된 길을 걷게 된다. 특히 유명론의 전통이 강한 영국의 상황에서 경험과학의 수혜를 받고 자란 로크의 사상적 기질은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전제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실 로크가 대륙의 합리론과 선을 긋게 된 배경에는 이론적이기 보다 실용적이고 정치적인 이유가 앞섰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는 우연히 자신이 집도한 의회파의 거두와 친교를 쌓게 되면서 자연스레 정치활동에 몸을 담그기 시작했다. 따라서 그는 군주정의 전통과 결별하길 원했고 왕권신수설 같은 형이상학적 근거의 기만성을 공격하고자 했다. 핵심은 합리론의 본유관념(innate ideas)이다. 경험과 교육을 깡그리 무시하는 발상에 격분한 로크는 그것을 “게으른 자가 겪는 탐구의 고통을 단지 덜어주는” 만병통치약에 비유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을까? 이제 우리의 마음은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흰 서판에 불과하고 그것을 다채롭게 채우기 위해선 경험을 가능케 하는 외부세계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대상은 그 자체로 경험되지 않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그로 인해 생겨나는 갖가지 관념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리의 보증이란 요원한 것일까? 적어도 실용성을 강조하는 로크에겐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경험적 지식이 무익한 것은 아니다. “배의 닻줄은 바다 밑까지 닿을 만큼 길지 못하지만, 그래도 뱃사람이 그 길이를 아는 것은 항해에 도움”이 되니까. 이러한 소박한 인식론의 배를 몰고 그가 정작 항해하고자 했던 목표는 변화무쌍한 사회를 해석하는 일이었다. 당시 부상하기 시작한 의회제와 시민적 자유의 정당화가 그의 시급한 과제였다. 홉스가 만인의 폭력상황을 극복하고자 사회계약과 강력한 군주를 주장했지만, 자연상태를 낙관적으로 본 로크의 입장에서 ‘리바이어던’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건 괴물의 입속으로 자청해서 들어가는 꼴이다.

로크에게 생명과 자유 그리고 재산은 절대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불가침영역이다. 따라서 개인 간의 다툼을 방지하고 이를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국가만이 요청될 뿐이다. 잘 알려졌다시피 로크의 사회이론은 미국 헌법의 초석이 되었다. 오사마의 사살로 ‘정의의 실현’을 외치는 오늘날의 미국은, 과연 로크에게서 얼마만큼 빚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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