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읽어주는 남자

입안에 사막을 들였다는 것은 조바심이 당신을 바짝 구웠다는 증거,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 혀끝에서부터 고사목들을 세우기 시작한다
- 권혁웅, 「군입」 중에서

권혁웅이 시집을 펴내며 그 앞머리에 “시절이 달랐다면 여기에 실린 시들의 절반은 쓰이지 않았거나 여기에 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라고 밝힌 바와 같이, 그의 시적 작업은 한국의 정치 현실과 관련이 깊은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논객들이 진단하는 바와 같이, 오늘날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보수 진영과 진보·개혁 진영 사이의 대립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권혁웅은 서시인 위 시편에서 그 오늘날 정치에 대해 느끼게 되는 불편함의 기원을 ‘바깥’으로 명확히 지목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깥에서 불어온 바람”이라는 것, 다시 말해 시인은 유전적 부모가 공여(供與)한 수정란을 잠시 품었을 따름이라는 것이지요.

그 바람을 타고 든 무엇이 “입안에 사막을 들인” 양 꺼끌꺼끌함이 불편했다고, 그것이 시인에게 “조바심”을 만들어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 기원을 ‘바깥’이라 단정할 수 있다면, 우리는 시인에게 양해를 구하지도 않은 채 그를 시어의 ‘대리모’라 칭할 수 있을 런지도 모릅니다. 최근 권혁웅의 시편들에서 구사되는 시어들은 실은 광장에서 한두 번쯤은 들었을 법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권혁웅의 시적 성취를 그 정도로 과소평가해서는 곤란해보입니다. “혀끝에서부터 고사목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설사 그것이 고사목이라 하더라도 그가 세운 나무의 위엄은 작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지요. 나무를 세운다는 것, 아니 ‘나무’(木)라는 말 그 자체가 상황에 따라 힘과 위엄이라는 의미 작용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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