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6)영국의 경험론 2

1688년 영국에서 절대주의와 종교탄압의 상징이었던 제임스 2세를 끝장내고 군주 위에 의회가 있음을 권리장전으로 못 박은 ‘명예혁명’이 발발했을 때, 그 사상적 지주였던 로크는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애초부터 철학보다는 정치에 관심을 가졌던 그에게 말년에 찾아온 정치적 자유의 분위기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주축 세력이었던 청교도들의 입장에선 사태가 바람직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정치적 자유 못지않은 종교적 자유의 확보로 경건한 분위기가 만연할 거라는 기대와는 반대로, 정치적 안정 속에서 사회는 점점 더 속세의 문제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연을 기계적으로 파악했던 과학적 사고가 더해지면서, 이제 세속화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로크의 뒤를 이어 영국의 경험론의 바통을 이어받은 조지 버클리는 명예혁명이 터지기 직전 아일랜드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청교도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가 경험한 혁명의 분위기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 자유로운 사회분위기는 그의 저돌적인 모험심에 충분히 어울리는 것이었지만, 그 대가로 희생된 신앙적 침체는 독실한 종교인으로서 그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른 나이에 학자적 명성을 어느 정도 쌓은 그는 한 때 종교적이고 학문적인 유토피아를 꿈꾸며 대서양을 건넌 적도 있었다. 이른바 ‘버뮤다 프로젝트’는 물거품으로 끝났지만 그의 이름은 지금도 남아 모 대학의 이름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치기와 방황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의 주된 목표는 오직 한 가지였다. 종교가 그것이다.

경험론 전통에서 로크와 흄 사이에 낀 버클리는 앞의 두 학자에 비해 학문적 명성에서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축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철학사에서 회자되는 이유 중 하나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담은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인간지식 원리론』이란 책에서 그는 학문의 오류가 회의론과 무신론을 낳는다고 보았다. 따라서 오류를 시정하면 철학과 신학으로 대표되는 학문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여긴 것 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그 해법이 지나치게 과격했다는 것. 그는 상식을 강조했지만 결과는 상식과 멀어 보였다. 발단은 책 제목처럼 인식에서 출발한다. 앞서 로크는 지식의 가능조건을 위해 인식대상과 인식주체를 나눈 바 있다. 남은 건 양자의 조화로운 만남이지만, 버클리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런 회의적 시각은 버클리 자신이 비판한 회의론과 똑같은 게 아닌가? 하지만 그는 로크의 주장이야말로 회의론에 가깝다고 말한다. 대상에 제1성질(연장)을 주체에 제2성질(색깔)을 두고, 전자가 후자를 야기해 관념을 만든다는 로크의 주장엔 사실 약점이 있다. 예를 들어 색깔 없이 연장을 그 자체로 인식할 수 있을까? 이는 불가능하다. 심지어 관념을 만드는 제2성질 바깥의 대상에 대해 우리는 감히 안다고 말할 수조차 없다. 로크가 물질 실체를 “그것이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때 그는 그것을 부정했어야 했다. 유명론의 후예답게 버클리는 ‘오컴의 면도날’을 들고 관념 외의 것을 잘라냈다. 그렇다면 관념은 어디서 오는가? 지각 외엔 없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은 지각된 것이다.”

어떤 이는 돌멩이를 걷어차 보면 그게 단지 관념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거라며 조롱했다. 하지만 버클리가 부정한 건 엄밀히 말해 개별사물이 아니라 그것의 실체다. 이점에서 그는 운동을 부정한 그리스의 제논을 닮았다. 황당하지만 반박하기 어려운. 다른 이는 그럼 지각을 멈출 땐 그 존재가 사라진단 말이냐고 물었다. 버클리는 언제나 지각하는 존재, 즉 신이 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응수했다. deus ex machina. 역시 전통은 질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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