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떠났던 조선왕실의궤가 돌아왔다. 지난달 27일 병인양요 때 약탈당했던 외규장각도서 296권의 반환이 완료됐다. 외규장각도서는 5년 단위의 대여형식을 빌려 145년 만에 우리에게 돌아왔다. 곧 돌아올 서적도 있다. 지난달 27일 한일도서협정이 일본 참의원 본의회를 통과함으로써 일본 국회의 비준절차가 마무리됐다.

협정이 발효되면 일본정부는 6개월 이내로 도서를 반환해야 한다. 따라서 늦어도 올해 안으로 일본 궁내청에서 보관 중인 1205권의 약탈 도서가 우리나라로 돌아올 예정이다. 이번에 반환되는 도서 중 특히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는 서적이 있는데, 바로 조선왕실의궤다.

조선시대 왕실기록의 보물창고

조선왕실의궤는 국가나 왕실의 주요 의식과 행사를 상세하게 적고 그림으로 남긴 서적이다. 국왕의 혼인이나 세자 책봉, 왕실의 혼례와 장례, 궁궐의 건축 등의 기록이 담겨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주요한 행사가 있을 때 선왕 때의 사례를 참고했다. 조선 왕실은 국가 행사에 관계된 사항을 의궤에 기록해 둠으로써 후대에 행사를 치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의궤는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로 구분할 수 있다. 어람용 의궤는 국왕의 열람용으로 만들어졌다. 국왕이 직접 보는 의궤인 만큼 고급스러운 종이를 사용하고 화려한 비단으로 표지를 장식했다. 분상용 의궤는 비교적 소박하게 만들어졌다. 분상용이라는 이름답게 여러 권이 만들어져 보관됐다.

의궤에는 국정 행사에 관한 모든 사항이 자세히 기록됐다. 행사에 동원된 인원의 명단, 사용된 물품의 크기와 재료 등이 상세히 정리돼 있다. 특히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실명이 정확히 기록된 것이 눈에 띈다. 이는 작업에 대한 책임을 명확히 하고 사람들이 사명감을 갖고 행사에 참여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의궤에 담겨있는 수많은 기록 중 국정 행사 장면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반차도이다. 반차도는 오늘날의 사진과 같이 행사 당시의 모습을 기록한 그림이다. 반차도를 통해 행사에 참여한 인원과 배치, 가마의 배치, 의장기의 모습 등 행사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반차도의 제작은 조선시대 관청인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들이 맡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홍도와 그 제자들도 반차도의 제작에 많은 기여를 했다.

궁궐과 성곽 건축에 관한 기록도 존재한다. 건물의 위치, 구조와 재료 등이 그것이다. 또한 의복과 장식품 등에 대한 정보도 치밀하게 기록돼 있다.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기록됐는지 의궤를 보면 별 어려움 없이 조선시대의 행사나 건물, 물품들을 재현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의궤가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정수로 평가받는 이유다.


▲ 일본에서 돌아올 조선왕실의궤 명성황후국상도감 발인반차도.

의궤가 소중한 이유

조선시대 기록물들과 비교해 볼때 의궤의 차별점은 바로 그림자료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글로만 구성된 보고서가 아니기 때문에 행사 모습을 입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의궤에는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의 옷과 장식품 등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소 강문식 학예연구사는 “의궤를 통해 조선시대의 행정시스템은 물론, 미술과 복식에 관한 정보도 얻을 수 있다. 이는 미술사와 복식사에 있어 중요한 사료가 된다”라고 말했다.

조선왕실의궤는 그 세계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7년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가 유교문화권이었기 때문이다. 강문식 학예연구사는 “의궤에는 유교문화권에서 행해졌던 다양한 행사와 의식들이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유교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끊이지 않는 수난에 휩싸이다

의궤는 조선 초기부터 만들어졌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모두 1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전란 속에서 의궤를 포함한 왕실의 기록물들 중 상당수가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전란 이후에도 의궤는 계속 만들어졌지만, 수난은 끝나지 않았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외규장각이 약탈당하면서 프랑스로 반출되기도 했다. 당시 외규장각에는 중요한 어람용 의궤가 보관돼 있었다. 외규장각이 있는 강화도가 당시에는 가장 안전한 지역 중 하나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양의 신식군대를 막기는 쉽지 않았고, 그들은 의궤를 포함한 귀중한 서적들을 약탈해갔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던 시기에도 약탈은 벌어졌다. 분상용 의궤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서적들은 규장각과 네 곳의 서고에 보관됐는데, 이 또한 일본의 눈을 피하진 못했다. 특히 오대산 서고의 의궤들 중 상당수가 약탈당했다. 다른 서적들과 함께 일본으로 유출된 의궤는 현재까지 일본 궁내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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