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 (9)근대철학의 통일과 해체

째째한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려는 행위를 ‘꼼수’라 부른다. 하지만 꼼수에도 질적 차이가 있다. 논란 많은 행사 참여로 비판에 직면했을 때 ‘모르고 갔었다’고 답하는 건 암기식 정답이지만, 혐의자가 단서를 스스로 누설해 곤욕스러워할 때 ‘주어가 없다’는 한마디로 난국을 타개하는 건 논술형 기예에 가깝다.

꼼수 중의 꼼수를 찾기 위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요즘 화제다. 지금까지 부동의 1위를 기록한 오직 그 한 분을 기리기 위해 ‘각하헌정방송’이란 타이틀을 내건 ‘나는 꼼수다’가 그것. BBK 의혹을 “새빨간 거짓말이다!”란 사자후로 날리시고 정주영 비화에는 “믿는 사람이 있겠는가?”로 눙치시는 그분의 냉온신공 앞에 편파방송 시비는 자취를 감춘 듯하다.

철학 계에도 이러한 꼼수가 통할까? 사실 사색의 역사는 꼼수의 역사라 불러도 무방하다. 그 출발 자체가 감각으론 파악할 수 없는 ‘아르케’의 탐구였으니 오죽했겠는가! 하지만 사색의 꼼수는 철학의 내용을 풍성하게 한 감초의 역할을 했다. 진리를 찾기 위해 대상(자연)에서 주체(인간)로, 다시 그 둘의 관계를 따지는 과정에서, 누군가 외친 ‘유레카’는 다른 이의 반박으로 보충·심화되거나 아예 문제틀 자체를 변화시켜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칸트의 철학이다. 인식론의 분열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그는 인식 바깥의 경험 대상을 상정했지만 이성의 월권을 막는다는 구실로 대상 자체에 대해서는 의문에 붙이는 초강력 꼼수를 사용했다. 궁극의 실재는 존재하나 거기에 다다를 수 없다는 물자체의 역설!

칸트는 이성에 제약을 둠으로써 그 확실성을 보장하고자 했지만, 사색의 생리상 ‘제한’이란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의 동료와 후학들은 물자체의 난점을 물고 늘어졌다. 야코비는 “물자체의 개념 없이 칸트철학으로 들어갈 수 없고, 물자체의 개념을 갖고서는 칸트철학에 머물 수 없다”고 조롱했다. 하지만 이러한 모순이 마냥 놀림감이 된 것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난제는 과제를 낳고 과제는 그들의 철학적 밥벌이를 보장해 주니까. 실러의 말마따나, “왕이 공사에 착수하면 일꾼들에게 할 일이 생긴다.” 따라서 수많은 일꾼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에서도 눈에 띠는 이들이 피히테와 셸링이었다. 독일관념론의 가교역할을 한 이 둘은, 그러나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

품삯을 톡톡히 받은 이는 피히테다. 인쇄업자의 실수로 이른 나이에 출간한 책에 저자명이 누락되는 통에 칸트의 것으로 오해받다가 노교수의 정정으로 일약 스타가 됐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제2의 칸트에 만족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야코비의 역설에서 피히테는 후자의 문장에 주목했다. 물자체를 포기하면 어떻게 될까? 남은 건 주체 쪽의 선험적 인식이지만, 경험의 보증을 포기한 이상 인식에 앞선 강력한 후견인이 요구된다. 피히테는 그것을 통 크게 ‘절대적 자아’라 불렀다. 태초에 자아가 있었다! 그렇다면 자연은? 그것은 자아가 스스로를 부정해서 생긴 비아(非我)에 불과하다. 자아의 활동성은 이렇듯 자신을 부정한 뒤 새롭게 복귀함으로써 영향력을 증대시켜 나가는 자기증식적 존재다.

잘 나가던 피히테는 무신론자로 낙인찍히며 교수직에 물러나는 시련을 겪는다. 하지만 그의 그늘에 가려졌던 셸링에게는 행운이었으리라. 낭만적 기질이 농후했던 그는 자아로의 복귀보다 거대한 대자연에 관심이 많았다. 자연의 핵심은 한갓 사물이 아니라 변화 자체다! 물론 물자체의 난점을 피하려는 또 다른 꼼수가 엿보이지만, 자연과의 직관적 합일을 강조하는 그의 예술철학 덕에 미학분야는 또 하나의 커다란 자양분을 얻게 되었다.


“최고의 통일성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에 의해 산출되어야 할 것, 그러나 결코 그렇게 산출될 수는 없는 것이다.”
-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1765~1804)


신재성(철학과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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