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고수들 (14)근대철학의 통일과 해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을 보면, 무소불위의 권력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웃음’이다. 하여 중세의 권력은 성스러운 수도원에 울려 퍼질지 모를 낄낄대는 웃음을 차단하기 위해 금서로 지정된 〈희극〉의 페이지마다 열심히 독을 발랐던 것이다. 21세기에도 이런 방식이 먹힐까? 최근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SNS를 심의한다면서 으름장을 놓으니 하는 말이다. 사실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막으려는 권력의 시도는 그동안 수차례 있어왔다. ‘그냥’ 민주주의도 모자라 굳이 ‘자유’를 붙여야 직성이 풀리는 이 정부에서 말이다! 지금은 민망한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개그를 집단 모욕죄로 단죄코자 했던 모 국회의원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갈등의 근원에는 웃음을 보는 두 가지 반대되는 시선이 놓여 있다. 누군가가 저열한 비방으로 보는 것을 다른 누군가는 해학과 풍자로 읽기 때문이다.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양자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했던 어느 사색가의 삶과 사상은 우리에게 약간의 단서를 제공해 줄지도 모른다. 자서전을 통해 “나는 성인이 되느니 차라리 사티로스이고 싶다!”고 외친 인물인 니체로부터다. 사티로스는 반인 반수의 모습으로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따르는 호색적인 정령이자, 그리스 비극의 공연이 끝난 후 기분전환을 위해 배치된 희극 속 주인공이다. 오늘날 풍자를 뜻하는 ‘satire’는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 그렇다면 니체는 왜 흉물스런 괴물의 삶을 꿈꾼 걸까? 그리고 그를 통해 풍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괴기스런 이미지와는 달리 어린 니체는 루터교 집안의 경건한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약관의 나이에 고전문헌학 교수직을 얻을 만큼 명민한 청년이기도 했다. 그런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 건 중고 책방에서 만난 쇼펜하우어의 책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였다. 순종적인 삶의 이면에 놓인 격리되고 얽매였던 삶에 염증을 느끼던 차에, 세계란 단지 알 수 없는 ‘의지’의 발현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경구는 그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다만 의지의 지배 앞에서 무기력하게 절망하거나 도피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만큼은 동의하기가 어려웠다. 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의지에 대한 회의가 아닌 긍정을 말이다!

하지만 삶은 단지 긍정을 선택한다고 주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긍정을 부정하고 복종과 회의를 강요하는 현실의 질서가 워낙에 강고한 탓이다. 따라서 유일한 방법은 전도와 대체가 아닌 해체와 파괴일 뿐이다. 니체는 철학적 ‘망치’를 꺼내들고 기존의 가치를 부수기 시작한다. 그 대상은 이데아의 찬미와 신에 대한 복종을 설파한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일 수밖에 없었다. “성공한 사람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격언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너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면 너 자신이 될 것이다’라는 계명에 따라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강자가 될 것을 주장한다. 그것은 약자의 도덕을 버리고 철저히 세속의 삶을 긍정하는, 그래서 나약한 인간의 조건을 뛰어 넘는 ‘초인’이 되는 것이다!

약자를 경멸하고 강자를 칭송한 그의 사상을 오해할 필요는 없다. 그에게 약자란 ‘원한’의 감정을 토대로 동정심을 유발함으로써 강자의 의지를 무력화시키려는 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인이 아닌 사티로스를 선택한 니체의 의도는 분명하다. 약자의 원한은 상대를 깎아내릴 수는 있을지언정 강자의 조롱과 풍자처럼 자신의 힘을 결코 키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타인을 고소함으로써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그로 인한 여론의 질타를 인지도의 상승으로 기뻐하는 자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인간이 위대해지기 위해 내가 제안하는 공식은 ‘너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이다. 즉 현재의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되기를 바라지 않는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미래에도, 과거에도 그리고 영원히.”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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