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사회_ 화차

당신은 당신의 주변 사람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 알려고 하긴 하는가. 우리는 언제부턴가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것을 귀찮아하고 지겨워하는 사람이 되지는 않았는가. <화차>에는 무관심하고 차가운 사회의 피해자이자, 그런 사회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비극적인 여인이 등장한다.

‘문호’는 결혼을 약속한 ‘선영’과 고향집으로 내려가다 휴게소에 들른다. 문호가 커피를 사러간 사이, 선영은 문호의 친구 ‘동우’에게 개인파산을 했냐는 전화를 받게 된다. 그리고 선영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해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실종된 선영은 은행잔고를 모두 인출하고 자취방에 남아있는 지문까지 모두 지우는 치밀함을 보인다. 문호는 선영의 행방을 찾으면서 자신이 알던 그녀는 가짜였으며 그녀가 살인 사건에 연루돼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선영의 실제 이름은 차경선. 고아원에서 자란 그녀는 결혼 후 아버지의 사채 빚을 독촉하는 사채업자의 횡포로 이혼을 하게 된다. 그 후 경선은 사채업자에게 붙잡혀 술집을 전전하다 겨우 도망친다. 상경한 그녀는 새 삶을 위해 회사의 고객정보를 훔치고, 그 중 한 명을 살해한 후 그녀를 대신해 살아간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가죽을 쓰고 살아가게 된 이유는 뭘까? 단순히 사채 빚과 신용 불량이라는 낙인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일까? 그러나 문제의 심연에는 사람들의 무관심이 있다. 사람들은 그녀의 고통을 외면했고, 결국 세상에 홀로 남겨진 그녀는 해서는 안 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경선이 선영을 살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선영에게서 소외된 자신과 같은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세상이 자신을 잊었던 것처럼 세상도 그렇게 선영을 쉽게 잊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경선이 자신의 이름에 애착을 갖지 못하고 선영이 된 것은 어쩌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동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했던 말이 있다. “어떻게 사람 하나가 없어졌는데 아무도 모를 수 있어?” 그렇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현재 우리는 사람 하나쯤은 없어져도 아무도 모르는 사회에 살고 있다. “지하 쪽방에 혼자 사는 여인, 한 달만에 숨진 채 발견…….” 이런 뉴스에 진정으로 가슴 아파하는 이들은 갈수록 줄고 있다. 개인의 고통을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한다면 `제2의 경선`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다. 진정으로 풍요로운 사회는 인간들이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함께 할 때 가능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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