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봉의 소리

주마간산(走馬看山)은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산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의역하면 너무 바빠서 사물을 자세하게 살펴보지 못하고 대강대강 훑어본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성어는 예의 ‘속도’에 대한 삶의 태도를 언급한 것이 된다. 속도로 보면, 말은 소보다 잘 달리는 동물이다. 그래서 ‘말’이라는 기호에는 ‘고속’이라는 의미가, ‘소’라는 기호에는 ‘저속’이라는 의미가 내장되어 있다. 필자가 말을 고속문명 사회로, 소를 저속문명 사회로 비유할 수 있는 것도 이에 근거한다. 고속문명 사회는 속도를 요구하기에 어떤 일을 자세히 살피고 사유할 시간적 여건을 허락해주지 않는다. 어떤 일을 빨리 끝내고 또 다른 일을 시작해야 하기에 그러하다. 요컨대 말 위에 있는 삶의 형식인 셈이다. 만약에 우리가 소를 타고 있는 삶의 형식이라면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필자가 고속과 저속의 삶의 형식을 언급한 이유는 적어도 이것이 대학 글쓰기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이를 언급하기 전에 필자가 경험한 사례를 간략하게 소개하도록 한다. 아침 시간, 전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바로 옆에 앉은 젊은 회사원(?) 한 사람이 자기 무릎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무슨 보고서를 작성하는지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 화면을 잠깐씩 훔쳐볼 때마다 글자들은 마치 로켓이 날아가는 것처럼 그렇게 앞을 향해 일제히 달려 나가고 있었다. 이삼십 분이 지나자 글쓰기가 끝났는지 빠르게 한번 훑어보고는 노트북을 닫았다. 요컨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의 글쓰기였다. 그렇다면 우리 대학생들의 글쓰기 태도는 어떨까? 비약이겠지만 조금은 비슷하지 않을까.

기계처럼 손가락이 빠르게 치는 대로 작성된 글도 물론 글이다. 하지만 이 글은 깊은 사유를 동반하지 않은 글, 적어도 오랜 시간을 통하여 수정과 퇴고를 하지 않은 글이다. 즉 보고서의 내용만을 채우기 위한 형식적인 글인 셈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면 젊은이가 완성한 글은 글이 아니고 글쓰기를 시작하기 위하여 모아 놓은 산만한 소재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글쓰기를 위해서는 모아 놓은 산만한 소재들을 어떻게 선택하고 구성할 것인가에 대한 사유를 해야 한다. 곧 깊게 사유할 수 있는 저속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강조하자면 고속으로 행한 글쓰기에서 끝내지 말고 저속으로 행하는 글쓰기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때 비로소 진정한 글쓰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소를 타고 가는 삶의 형식으로서의 글쓰기이다.

글쓰기는 ‘나’를 이 세상에 가장 창의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코드이다. 이 코드가 성공하면 곧 ‘내’가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코드를 성공적으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사유할 수 있는 저속의 시간이 필요하다. 가령, 헤밍웨이는 좥노인과 바다좦를 통하여 자기를 성공적으로 드러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이 작품을 무려 2백여 번 고쳐 쓰고 난 다음에 발표했다. 고속의 글쓰기는 자기 만족감을 주지만 자기를 성공적으로 드러내기는 어렵다. 사유를 통한 저속의 글쓰기만이 자기를 성공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대학의 글쓰기는 저속의 글쓰기가 돼야 할 터이다.

정유화(교양교직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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