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모습과 마음 속 숨은 표정까지도 이해해주길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저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 7시 집에서 학교로 그리고 저녁 10시 학교에서 집으로. 내 동선은 주말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내 고등학교에는 큰 위안거리 두 가지가 있었다. 우선 내 모교는 넓은 호수가 있는 대학교 캠퍼스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공부에 찌든 나는 밝은 햇살과 푸르른 나무로 치장한 캠퍼스를 산책하며 대학생 생활을 꿈꿔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내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은 반에 있지는 않았지만 교정에서 언제든 여학생들을 볼 수 있었다. 저녁시간에 선발된 남녀학생들은 도서실에서 함께 자율학습을 했었다.

그곳에 바로 그녀가 있었다. 같은 중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이 돼서야 내 마음 속에 찾아들어왔다. 그러나 소위 노는 친구들이나 이성교제를 했었던 그 때, 모범생이었던 난 단 한번도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래도 도서실에서 그리고 캠퍼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얼굴을 찡그린 채 수학문제를 풀 던 모습, 대학교 식당에서 후후 불며 라면을 먹던 모습, 친구와 손을 맞잡고 깔깔 웃던 모습, 밝은 달빛 아래에서 가만히 집으로 가는 모습까지. 친구들은 그녀의 위치를 즉각 알려주는 눈물겨운 우정으로 나를 도와줬다. 사실 그녀는 그리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난 그녀의 자연스러운 모습들이 너무나 예쁘고 좋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자만 바람에 흩날리는 마음을 소유한 것이 아니었다. 한 여인의 소소한 아름다움을 알아버린 내 눈은 다른 여인들의 모습들도 놓치지 않았다. 언제나 짧은 단발에 보이쉬한 외모의 소유자였던 또 다른 그녀. 녹음이 짙게 깔린 여름날, “그대와 영원이”를 흥얼거리며 등굣길을 내려가던 그녀의 옆모습은 시크한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키만 풀쩍 크고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또 다른 그녀. 모의고사 답을 맞춰보며 연필을 쥐고 있었던 그녀의 손은 의외로 앙증스러웠다. 나는 나도 모르게 많은 여학생들의 예쁜 모습을 마음 속 앨범에 쌓아두게 되었다. 마음 속 그녀에게는 너무나 미안하지만 세상에 매력적인 여자는 너무나 많았다.

여성 열 중 여덟은 외모에 만족하지 못하고 셋은 외모 때문에 우울증, 대인기피, 자살충동 등을 느꼈단다. 휴우, 안타까운 한숨이 나온다. 적어도 우리대학 남학생들은 내 모교가 나에게 선사한 눈을 가졌으면 한다. “세상의 모든 여성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떡이게 했던 내 마음속 사진들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이지 주변 여자들에게 “그녀를 둘러싼 수많은 모습과 마음 속 숨은 표정까지도” 이해해주고 일깨워줄 수 있기를 바란다.

p.s. 버스커 버스커의 ‘이상형’에 대해 이게 뭐야 하는 남학생들은 제발 여학생을 사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서울시립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