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병우(글쓰기센터 연구교수)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우리의 마음은 내면으로 향하게 된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마음은 자연의 변화에 조응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소 식상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이 아직도 유효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문제는 어떤 책을 읽을 것이냐이다. 대학, 언론사, 유명인사 등이 종종 발표하는 추천도서 목록이 썩 마음에 와 닿지 않은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마다 문제의식이 다르고 책을 읽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도서 목록이 때때로 갱신되고, 세계 유수한 대학에서 신입생들이 졸업 전까지 읽어야 할 필독서 목록을 발표하는 것은 독서에 모종의 공통 목적이 있다는 생각을 전제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독서의 근본적인 목적은 자아를 튼튼하게 하는 것이다. 튼튼한 자아라는 말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으나, 이 말에는 폭넓은 사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대응 등이 포함되어 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사회는 이러한 자질을 가진 사람을 요구한다. 튼튼한 자아를 가진 사람은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능력을 가졌다. 이 때문에 복잡다기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사람은 소중한 사회적 자산으로 간주된다.

모든 책이 이러한 자질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의 책을 고를 것인가? 잠시 시야를 넓혀 역사를 돌이켜보면, 당대에는 크게 유행했으나 시간의 흐름 속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책들이 수없이 많은 반면, 그 흐름을 견디고 아직도 살아남은 책들이 있다. 나아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가치를 발하는 책들도 있다. 이러한 책들을 고전(古典, classics)이라고 부른다.

고전이 고전인 까닭은 인간 정신의 공통분모를 잘 포착했기 때문이다. 베르테르의 슬픔이 한국의 젊은이에게도 공감되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강렬하고 비극적인 사랑이 세계 전역에 알려진 것은 인간 정신의 공통분모가 시대와 국경을 넘어 공감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고전의 가치는 시대가 바뀌면 빛이 바래는 실용서적의 가치와 뚜렷이 대비된다.

인스턴트 식품이 편리하고 입에 착 감기지만 건강에 해로운 반면, 슬로우 푸드는 준비하기에 시간이 걸리고 처음에는 맛도 별로 없는 듯하지만 건강에 좋다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그렇다면 인스턴트 식품처럼 즉각적인 만족감을 주는 책보다는, 슬로우 푸드 같은 고전을 많이 읽는 것이 정신을 튼튼하게 하는 일이지 않을까. 그리고 슬로우 푸드가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듯, 고전의 매력은 여러 번 읽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난다는 데 있다. 십대에 읽은 『햄릿』을 이십대에 읽으면 다른 면이 보이고, 삼십대에는 또 다른 면이, 사십대에는 또 다른 면이 보이는 것이 바로 고전의 매력인 것이다. 이 가을, 슬로우 푸드와 같은 고전의 매력에 빠지는 학생들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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