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읍을 정하기 위한 과정에서 지명 생겨나
고미술상가, 간데메 공원 등 볼거리 풍부해


우리대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답십리가 있다. 현재 행정구역 명칭이 아니면서 ‘리(里)’로 끝나는 지명은 청량리, 왕십리 등 소수만 남아있다. 이같이 ‘리’로 끝나는 지명들은 역사가 오래되고 그 유래가 특별한 경우가 많다. 과연 답십리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을까?

▲ 문 앞까지 고미술품이 널린 고미술상가
답십리라는 이름의 유래는 무학대사가 왕도(王都)를 정하려고 한 과정에 생겼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조선 초 무학대사는 과거 신라의 도선대사가 창시한 풍수지리를 토대로 왕도를 정하기 위해 계룡산, 한양 등을 두루 돌아다녔다. 여정 중 무학대사는 답십리를 찾았는데 이 때 답십리가 있는 곳을 밟았다고 해서 밟을 답(踏), 찾을 심(尋) 마을 리(里)를 써서 ‘답심리(踏尋里)’로 지었고, 점차 시간이 흐르자 ‘답심리’가 ‘답십리’로 발음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답십리의 또다른 지명 설화는 흥인지문에서 10리 떨어진 곳이라 하여 답십리(踏十里)로 불린다는 것인데 이는 왕십리와 그 지명 설화가 꼭 같다. 당시 무학대사가 도읍을 찾던 중 도선대사의 변신인 한 노인이 “십리를 더 가서 도읍지를 찾으시오”라고 하자 그 자리에서 10리를 걸어 궁궐터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밟을 답(踏), 열 십(十) 마을 리(里)로 지어졌다고 추정된다. 이밖에 청계천 하류지역이던 이 지역의 논이 10리만큼 넓다 해서 이름이 불렸다는 설도 있다.

▲ 주민들의 쉼터가 되는 간데메 공원
세월이 흘러 무학대사의 자취는 사라졌다. 다만 '답십리 고미술상가'를 통해 옛 우리 민족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상가 앞에는 부처상과 석등, 해태상  등 옛 정취가 물씬 풍겨나오는 석상들이 이정표가 돼주고 있다. 상가 안으로 들어가면 다양한 불상과 잡다한 조선시대 생활용품, 도자기가 낯선 방문자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고미술상가의 물건들을 통해 우리는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 속에 멈춰있는 옛날을 만날 수 있다.

고미술상가의 근처엔 간데메 공원이 있다. 답십리의 촌락 중 하나였던 간데메는 중산(中山)이라는 의미의 고유어다. 무성한 나무 아래 트인 길은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쉼터를 제공한다. 또한 다양한 운동기구와 아이들의 놀이터가 있어 마을 주민들이 자주 찾는 장소이기도하다.

답십리는 우리대학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다. 무학대사가 걸었던 장면을 상상하며 답답한 일상 속에서 ‘여유’를 가지고 자신만의 짧은 여행을 원한다면 답십리로 가는 것을 권한다.

▲ 고미술상가 내부의 모습

글·사진_ 박길성 기자 gilseong223@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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