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비 윤씨의 묘소인 ‘회묘’가 있던 곳
현재는 파전골목, 시조사 삼거리 등이 유명해


동대문구의 북쪽에는 청량리동, 회기동, 이문동 등이 있다. 이 중 회기동은 우리대학의 후문과 맞닿아 있어 후문으로 등교를 하는 많은 학생들이 지나게 되는 곳이다. 회기역 또한 우리대학과 경희대, 한국외대 사이에 위치해 각 대학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지하철역이다. 이처럼 등하교를 하며 많이 지나게 되는 회기동의 ‘회기’는 어떤 유래와 역사를 지니고 있는지 알아보자.

▲ 1909년에 만들어진 종합출판 시조사
‘회기’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성종의 왕비이자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회묘’가 있는데서 유래됐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윤씨는 폐비가 되고 3년 뒤 사약을 받고 죽는다. 그 후 윤씨는 ‘윤씨지묘’라는 초라한 묘비명과 함께 현재 경희대가 자리 잡고 있는 천장산 자락에 묻힌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연산군은 죽은 생모를 그리며 윤씨 묘의 봉분을 수리해 슬픈 사연을 간직한 묘라는 뜻의 ‘회묘(懷墓)’를 묘 이름으로 손수 지어 바친다.

▲ 회기동의 명물이 된 파전골목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통해 윤씨의 폐출, 죽음과 연관된 모든 이들에게 사형과 유배형을 내렸고 윤씨를 ‘제헌왕후’라 추모하고 회묘를 왕릉인 ‘회릉’으로 승격시킨다. 하지만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다시 회묘로 강등된다. 그 후 윤씨가 묻힌 천장산 일대는 회묘라는 지명을 갖게 됐다. 400여 년이 흐른 뒤 일제 강점기 때 ‘회(懷)’ 자가 쓰기 어렵다는 이유로 한자음이 같은 ‘회(回)’로 바꾸어 ‘회묘(回墓)’로 불렀다. 후에 ‘묘(墓)’ 자도 동네 이름에 좋지 않다고 해서 터 기(基) 자를 써 지금의 ‘회기(回基)’가 됐다.

윤씨의 묘는 1967년 경희대가 들어서면서 경기도 고양시로 이장됐다. 현재 회기동에서는 과거의 파란만장했던 역사의 흔적은 세월의 파도에 휩쓸려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지금 그 자리에서는 파전과 책 내음이 물씬 풍긴다. 회기역 근처에는 ‘파전골목’이 자리 잡고 있다. 파전골목은 우리대학, 경희대 등 주변 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멀리서도 많이 찾아와 회기동의 명물이 됐다. 회기역 서쪽으로는 오랜 역사를 지닌 종합출판사 ‘시조사’가 위치해 있다. 시조사는 기독교 출판사로 1909년에 만들어졌고 ‘시조’, ‘가정과 건강’ 등의 잡지를 발간하고 있다. 시조사 앞 쪽으로는 시조사 삼거리가 있다.

▲ 우리대학과 경희대, 한국외대 사이에 위치한 회기역
현재 회기동은 대학가와 파전골목, 시조사 삼거리로 활기 넘친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회묘를 떠올리며 어머니에 대한 연산군의 연민을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글·사진_ 조원우 기자 alwayskinder@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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