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남쪽으로 튀어>에서 주인공 지로의 아버지 이치로는 일본 사람이지만 일본 국민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에게 말한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학교는 결국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일꾼을 만들기 위한 교육을 할 뿐이라고 이치로는 비판한다.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배움의 방식이 꼭 학교 교육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의무교육 기간이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 진학할만한 연령의 자녀를 둔 부모는 의무적으로 자녀를 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학교에 간다. 나 역시 아침이면 학교에 갔다가 해가 지면 집에 돌아오는 남들과 같은 생활을 반복했다. 나는 그 과정에 추호도 의심을 품지 않았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학교 교육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고 해서 교과서를 통해 배운 모든 것이 쓸데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학교 교육의 문제점은 학생들에게 배움의 목적을 알려주지 않는 데 있다. 배움의 목적이 없으니 배움에 열정적일 수도 배움에 즐거움을 느낄 수도 없다. 오로지 학교가 강요하는 대로 국가가 원하는 대로 나아갈 뿐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그 종착역은 대학이 된다.

왜 배워야 하는지를 모르는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대학에 오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나 역시 처음엔 배움에 대한 설렘보다는 나에게 주어진 수많은 선택지가 부담으로 다가왔다. 기껏해야 다섯 개 중 하나의 답을 골라왔던 과거의 나에게 사회가 내놓은 문제는 너무도 풀기 어려웠다.

결국 주위에서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배움의 목적을 찾는다. 더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꿈꿨던 것처럼 더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를 한다. 이런 상황이니 배우고 싶은 과목이나 배우고 싶은 학문이 있을 리가 없다. 그저 어떤 강의가 좋은 학점을 주는지, 어떻게 하면 시험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는지에만 골몰한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순간부터 의무교육은 끝났다. 그리고 이제 대학생이다. 배우고 싶으면 배우고 배울 것이 없다면 학교에 가지 말자. 굳이 모든 것을 학교에서 배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문광호 기자(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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