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대’에 관한 그들의 해묵은 주장은 정신대 창설에 있어서 국가가 조직적으로 관여한 적도, 동원에 있어서 강제성도 없고 또한 정신대 여성에 관해서는 군표를 발행하여 응분의 보상을 했다는 식으로 압축된다. 전시 일본에 있어 군대가 국가기관이 아니라는 이 해괴할 발언을 어떻게 넘길 수 있을까? 지금까지 발행된 많은 분들의 증언과 이를 기록하고 재현한 ‘정신대 문학’은 하나 같이 그들이 속아서 또는 강제적으로 ‘정신대’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말이 다를 때는 피해자의 말이 우선시된다는 상식을 정녕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일괄적으로 지급되지도 못한 군표문제도 그렇다. 설령 그것이 지급되었더라도 패전국 일본이 전후 군표를 탕감해 주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강제적으로 반인륜적인 일을 시킨 후 휴지조각이 되어버린 군표를 지급했다고 해서 강제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일협정으로 일괄 타결된 차가운 돈만이 있을 뿐이다. 왜 계속해서 사과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전에 사과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고 국가라는 추상적인 집단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직접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진정성의 결핍은 물귀신 수법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수많은 기지촌으로 자유롭지 못한 미군과 베트남 전쟁에서 가혹행위를 저지른 한국군에 대한 반성은 그 나라의 국민들에게 맡겨야 할 문제다. 상호과실을 주장하는 당사자들은 쉽게 싸움을 끝내지 못한다. 야스쿠니가 종교기관임으로 내정에 관여하지 말라는 그들의 주장이 옳다면, 같은 논리로 그들 또한 타국의 문제에 대해 침묵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만행을 말하고 있는데 왜 베트남 얘기를 꺼내는가. 필자는 20세기 벽두에 근대화와 괄목할 만한 인문학의 진전을 이룩한 일본이 이러한 술수가 책임회피임을 모를 정도로 무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의 대중들은 마루야마가 군국주의 파시즘에 관한 분석에서 밝힌 대로 여전히 인텔리들과는 “격절”(隔絶)한 수준 차이를 보이는 무뢰배들인가? 그리하여 역사는 늘 소극(笑劇)으로 반복되고 있는가?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며 또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싶다.
권석우(영어영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