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는 속도를 요구하는 사회이다. 이러한 현상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질 것 같다. 디지털정보화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 다름 아닌 속도이기 때문이다. 속도는 속도를 요구하는 법이다. 그래서 아날로그적인 삶의 속도를 초월한 디지털적인 삶은 갈수록 그 가속도를 더욱 요구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가속도는 곡선의 시간적 삶보다는 직선의 시간적 삶을 더 선호한다. 예의 곡선의 시간적 삶은 자연적 우주적 시간에서 나온 산물이고, 직선의 시간적 삶은 인위적 인간적 시간에서 나온 산물이다. 가령 ‘봄-여름-가을-겨울’의 순환적인 시간운동이 전자를 대표하고, ‘과거-현재-미래’로의 직선적인 시간운동이 후자를 대표한다.

문제는 가속도를 내고 있는 직선의 시간적인 삶의 형식이 많은 부작용을 산출해내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그 형식은 자기 이기적인 주체성과 경직화된 대립 체계들을 산출해내고 있다. 그 이유는 직선적인 삶의 형식이 사용가치보다는 교환가치를, 존재론적 가치보다는 효용적 가치를 더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효용성의 결과로 얻게 된 산물도 다름 아닌 자본(돈)이 된다. 그러다보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러한 자본을 소유하기 위해 쉴 새 없이 빠른 속도로만 달려가고 있다. 만약에 삶의 속도가 느리다면, 이것은 경쟁에서 진다는 것, 곧 실패를 의미한다. 예의 직선적인 삶의 형식에서는 승자만이 권력을 잡을 수가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곡선적인 삶의 형식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곡선적인 삶의 형식은 느림, 조화, 배려, 사랑 등의 존재론적인 가치를 기반으로 하기에 그러하다. 때문에 이 형식에 속하는 대상들은 거의 대부분 약자에 해당한다. 가령, 인간의 개발대상인 자연, 도시의 개발대상인 농촌, 자본가들의 기계적 대상인 비정규직 노동자 등이 이를 대변해준다.

두 삶의 형식이 조화되어야 행복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부자/가난, 자본/노동, 지배/피지배, 정규직/비정규직…’ 등의 대립적 체계가 공고하게 된다. 이럴 경우, 후자는 전자에 의해 억압받는 좌절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주종의 폭력구조를 해체해야 한다. 그 해체 방법은 ‘이기적인 주체성’을 버리고 ‘환대로서의 주체성’을 세우는 일이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환대로서의 주체성’이란 ‘나’의 이기적인 욕망과 기득권을 포기하고 ‘나’보다 연약한 타자를 손님처럼 영접·환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이러한 주체성은 거의 부재하다. 그러므로 대학 지성인만이라도 이 주체성을 세워나가야 한다고 본다. 혹자는 약자들의 어떤 점이 좋아서, 약자들에게 무엇을 얻을 수 있다고 관심과 사랑을 베푸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답은 간단하다. 강자가 베풀지 않으면 누가 베풀 수 있는가. 비유로 신(神)과 인간의 관계를 들 수 있다. 신이 땅의 소산물을 인간에게 줄 때, 인간들이 모두 능력이 있어서, 선행해서 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모든 조건을 따지지 않고 단지 유한한 인 인간을 긍휼히 여기어 그저 사랑으로 베풀어 준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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