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기원 전 399년 아테네 거리. 자기 아버지를 살인죄로 고소한 에우티프론에게 소크라테스가 그 이유를 묻는다. 이들의 대화는 옳은 것과 신(神)이 그렇다고 말하는 것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로 이어지고 급한 약속이 생각난 에우티프론이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를 뜰 때까지 계속된다.

언뜻 보기에 ‘철학’이라는 말 이외에 별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오래된 이야기로 제 전공인 현대영미철학에 대한 소개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옳은 것이 무엇인지 묻고 간혹 이 개념을 신과 연관 짓는 사고방식을 발견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전혀 엉뚱한 시작은 아닌 셈인데, 어쨌든 앞으로 할 이야기는 철학 일반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하는 방법의 측면에서 현대영미철학이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라는 점을 미리 말해둡니다.

개념의 레고(lego) 블록

현대영미철학의 또 다른 오래된 이름은 ‘분석철학’입니다. 뭔가를 분석한다는 뜻이죠. 여기서 그 무엇은 바로 개념입니다. “그건 옳지 않아”, “이건 좋은 일이야, 추천 버튼을 누르겠어”, “그렇게 생각할 뿐이지 아는 건 아니잖아”, “정신적 풍요라는 것이 있을까” 등 우리의 말과 행동은 (옳고 그름, 좋은 것과 나쁜 것, 단순한 믿음과 앎, 정신과 물질 등의) 일종의 개념적 구분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개념은 다른 개념과 짜 맞추어지면 생각 혹은 사고방식을 만들어냅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옳음과 신의 명령이라는 개념 블록으로 구성된 사고방식에 대해 질문한 것입니다.

이런 분석은 물론 이른바 ‘철학적’ 주제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닙니다. 간단한 예로, ‘후회’라는 것은 적어도 실제와는 다른 행동의 가능성과 잘못된 선택이나 결과라는 개념 블록들로 구성됩니다(문득, 독자들에게 행위와 행위의 결과라는 두 개념 블록에 몇 가지 다른 블록을 첨가해서 윤리적으로 옳은 행위에 대한 분석을 해보라는 과제를 내고 싶은 유혹이 밀려옵니다).

논증에 대한 사랑

철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philosophy’의 어원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는데요, 이 말에 전혀 이의가 없지만 실제로 분석철학자들은 논증을 사랑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에우티프론이 자리를 뜨기 전까지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옳음-신의 조합을 지지하는 근거가 되는 논증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그 논증이 함축하는 바와 또 다른 조합의 가능성을 살펴봄으로써 그 논증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집니다.

후회의 경우에도, 누군가 후회는 전혀 쓸 데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다른 행위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일 수 있고 그렇다면 그 근거가 되는 논증을 비판적으로 살펴봐야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드러난 어떤 사고방식의 설계도 격인 논증과 실제 개념 블록이 잘 맞지 않거나 혹은 그것이 논란의 여지  없는 상식이나 잘 확립된 과학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 입장의 문제점을 보이게 되는 것이고, 동일한 주제에 대해 이런 철학적 해명 과정을 통과한 이른바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하나 이상 존재한다면 이들 간에 철학적 입장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은 비판과 논증을 위한 과정이 계속됩니다.

▲ 개념의 조합은 새로운 상상력의 공간을 제공한다.
인과(因果)

다양한 현상에 대한 과학적 예측, 설명, 통제, 조절에서 인과 관계의 규명은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요, 이렇듯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원인과 결과의 개념은 우리의 ‘개념 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분석철학자들이 연구하는 많은 주제 중에서 제 연구의 주제는 인과 개념입니다. 인과 분석은 이 개념이 법칙적 혹은 확률적 규칙성, 물리적 양의 교환, 반사실적 가능성, 조종 등의 개념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들 개념 블록의 조합에 대한 논리적 검토가 제 연구의 큰 축을 담당합니다. 또한 믿음, 욕구, 의도 등의 정신 현상이 인과적 영향력을 갖는다는 생각이 정신 현상의 본성에 대해 함축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최근에는 행위와 행위의 결과 간에 도덕적 책임의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인과적 구조가 성립해야 하는지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18세기 철학자 흄은 인과-규칙성-귀납추론 블록의 분석을 통해 당대 경험과학의 근거를 비판한 바 있는데, 이처럼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개념 블록의 조합을 실험해보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새로운 설계도를 상상하는 일은 때론 힘겹지만 때론 근사한 일이기도 합니다.

생각을 생각하기

우리의 삶은 생각과 함께 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과 선택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생각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면 강한 감정적 반응을 하는데 이는, 그러한 생각을 어떤 식으로 획득하게 되었는지 상관없이, 그 생각이 그들의 삶의 방식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제시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생각을 분석하고 그 근거가 되는 논증을 찾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일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정말 당연한 건지, 말도 안 되어 보이는 생각이 정말 말도 안 되는 건지에 대해 생각하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도와주고 또한 새로운 개념의 조합과 그 설계도를 탐험해볼 수 있는 개념적 상상력의 공간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제 생각입니다만, 바쁜 일로 자리를 떠야 될 일이 생길 수 있지만 그래도 길에서 마주친 누군가와 생각에 관해 생각해볼 시간을 갖는 것 … 흥미 있는 일일 수 있지 않을까요?


글_ 김성수 교수 sungsukim@uos.ac.kr
사진_ 송동한 기자 sdh1324@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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