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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우리 민족, 새터민의 탈북이야기
이설화 기자  |  lsha22c@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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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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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리나라에 새롭게 터를 잡은 탈북민은 약 2만 5천명. 이들은 모두 죽을 각오로 강을 건넌 사람들이다. 탈북 이후 중국과 동남아시아에 머물면서도 탈북자들은 언제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탈북자인 것이 들켜 북송되면 끔찍한 고문을 겪기 때문이다. 이들이 목숨까지 걸고도 탈북을 하는 이유는 주로 가난 때문이다. 배를 주리지 않기 위해 온 땅, 남한에서 이들은 배고픔은 잊었지만 이제 외로움을 안고 산다. 함께 하지 못한 60년의 차이를 극복할 순 없는 걸까.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끌려야 할 남과 북의 사이는 무엇 때문인지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가깝고도 먼 새터민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편집자 주-


   
 
배를 채우기 위해 택한 꽃제비 생활
저는 1990년도에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평양은 언제나 활기차고 건강한 도시로 보이려 애쓰는 곳이었어요. 팔다리가 없거나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는 사람은 받아줄 수 없는 도시가 바로 평양이에요. 평양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했기 때문이죠. 올바른 행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관료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들도 추방시켰어요. 술을 마시고 관료를 폭행한 저희 아버지 역시 용서할 수 없었나 봐요. 제가 4살 때, 저희 가족은 백두산 아래에 있는 양강도 백암으로 추방당했어요.

그곳은 울타리만 없었지 감옥과 다름없었습니다. 장마당이 있는 시내에 나가려면 꼬박 이틀을 걸어야 했으니까요. 평양에서 추방당한 뒤 아버지의 노름은 점점 더 심해졌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같이 술을 마시고 마을 사람들과 싸움을 하기 일쑤였고 집에 들어오는 날 밤이면 어머니를 때렸죠. 저희 집은 점점 빚이 늘었고 저는 항상 배고픔에 굶주렸어요. 매일 아침 집을 나서면 학교에 가는 대신 산에 올라 산나물로 배를 채웠습니다. 그리고 8살 때 즈음, 집에서 나와 길거리를 떠도는 꽃제비가 됐어요. 

기차역 앞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밥을 달라 애원했어요. 춤추고 노래하며 재롱을 부리면 간혹 먹을 것을 던져줘요. 꽃제비 조직에 들어가고 나서는 매일 일정량의 음식을 우두머리에게 갖다 바쳤어요. 그런 다음에야 제 몫도 챙길 수 있었죠. 구걸하는 일이 10살 아래의 아이들이 하는 일이고, 10살이 넘은 아이들은 장마당에서 사람들의 장바구니를 훔쳐 도망치는 짓을 해요. 속된 말로 ‘쓰리’라 하죠. 쓰리를 위해 유리잔에 검은 콩을 가득 담아 놓고 노란 콩 한알을 골라내는 연습도 했어요. 덕분(?)인지 술 취한 사람들의 바지 뒷주머니에서 쉽게 돈을 빼올 수 있었죠. 하지만 이런 일이 많다보니 사람들이 가방 깊숙한 곳에 돈을 숨겨놔요. 그래서 가방을 째기 위해 입에 면도칼을 물고 다니기도 했어요. 저의 이런 꽃제비 생활은 중국을 알게 된 12살 때까지 계속됐습니다.

   
▲ 배고픔에 굶주린 아이가 허겁지겁 국수를 먹고 있다.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두만강을 넘어 중국으로

꽃제비 생활을 하다 중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됐어요. 당시 북한에는 중국에 가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었죠. 중국에 가야겠다는 결심이 서자마자 꽃제비 무리에서 도망쳤습니다. 지금은 국경을 넘어가려는 사람들이 보이면 바로 총을 겨누지만 당시엔 경계가 삼엄한 편은 아니었어요. 물놀이를 하는 척하다 두만강을 건넜죠.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본 것이 옥수수 밭이에요. 남한은 새들을 쫓으려고 허수아비를 세워두죠? 북한은 누가 작물을 훔쳐갈까봐 사람이 밭을 지키고 있어요. 그런데 중국은 밭 근처에 경계를 서고 있는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거예요. 제겐 큰 충격이었어요. 중국에 온 첫날 밤 북한과 중국이 너무나도 다르다는 걸 느꼈습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쪽은 어두컴컴한데 한 쪽은 건물이 많고 환한 번화가인 거예요. 산도 참 이상한 게 북한 쪽은 나무가 앙상하고 중국 쪽은 잎이 풍성한 나무인 거 있죠?

돌이켜보니 저는 참 인복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처음 중국에 도착했을 때에도 길가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데 50대로 보이는 부부가 제가 귀엽다며 집으로 데려갔어요. 남한으로 온 16살 때도 제 키가 150cm를 넘지 못했으니 당시엔 정말 작았죠. 하루는 부부를 따라 시내에 나갔는데 거기에서 거리의 네온사인을 보고 또 한번 놀랐어요. 제가 살았던 백암은 전기도 잘 안 들어와 등잔불을 켜놓고 살았었거든요. 그렇게 부부를 한참 따라다니던 중 아이들을 꼬셔다 장기를 내다 판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또 다시 도망쳤죠.

   
▲ 중국에서 북송된 탈북자들은 지하 감방에서 ‘김정일 만세’를 외친다.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 중국과 몽골 사이의 국경을 넘은 아이가 드넓은 몽골 초원을 향해 달리고 있다. (영화 <크로싱>의 한 장면)
도망쳐 나와 북한에서 배운 쓰리 짓을 했어요. 우두머리에게 바쳐야 할 것이 없으니 잘 먹고 다녔죠. 그러다 묵게 된 곳이 탈북아이들을 숨겨주고 재워주며 성경을 가르치는 곳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안 사실인데 이곳은 탈북아이들을 모아놓고 장사를 하던 곳이더라고요. 미국, 호주 등 탈북자에게 관심이 많은 나라에서 이렇게 탈북자들을 모아놓은 단체에 돈을 주며 도와주는데 이런 돈을 중간에 가로채는 거죠. 이곳에서 학교도 2년 정도 다녔는데 운이 나쁘게도 신고를 당해서 신의주와 붙어있는 단동으로 북송됐어요.

이게 14살 즈음이었는데 1평 반~2평 남짓한 감옥에서 열 명의 아이들이 하루 종일 정자세로 앉아있어요. 지하 감방이었는데 모기와 빈대, 벼룩이 많아 고름이 질질 흐르는 아이들도 있었죠. 일주일 간 감옥에 있다가 고향 백암으로 가는 기차에 태워졌어요. 간리-함흥-우산으로 향하는 ‘평양-두만강’ 기차였죠. 그런데 저는 우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도망쳐 다시 중국으로 향했어요. 집에 돌아가게 되면 “이 집안은 도강자 집안이요. 반동새끼다”라는 말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니까요. 이번에도 두만강에서 노는 척을 하다 강을 건넜는데 이때 정말 죽을 뻔 했어요. 강이 얼마나 깊은지 알아보려고 나뭇가지로 깊이를 쟀는데 별로 깊지 않길래 강을 건넜죠. 그런데 조금 가다보니 깊은 웅덩이가 있는 거예요. 북한에서 강을 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중간 중간 웅덩이를 파놓았더라고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다 겨우 나뭇가지를 잡고 뭍으로 나오니 화룡이라는 중국의 한 마을이었어요. 쓰리를 하거나 구걸을 하며 밥은 먹었지만 단속이 심해져 재워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콩깍지를 덮고 자기도 하고 외양간에 쌓여있는 볏짚에 올라가 자기도 했어요. 단속이 심한 화룡에서의 생활이 각박해 기차를 타고 심양으로 향했어요. 하지만 얼마 못가 또 다시 북송됐죠. 잡힌 지역에 따라 호송되는 곳도 다른데 운이 나쁘게 또 다시 6개월 전과 똑같은 곳으로 잡혀갔어요. 집으로 다시 돌려보낸 줄 안 꼬마가 다시 잡혀오니 얼마나 화가 났겠어요. 삽자루로 엄청 두들겨 맞았습니다. 보통 일주일 간 감옥에 있다가 집으로 돌려보내지는데 이번에는 두 달을 갇혀있다 집으로 가는 기차에 실렸어요. 하지만 다시 같은 루트를 거쳐 중국으로 넘어갔죠. 그때 남한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았어요.

   
▲ 이야기의 주인공인 새터민 학생의 탈출 경로
중국-베트남-태국을 통해 남한으로 

남한으로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브로커를 통해 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남한에 가면 새터민 지원금이 나오니까 지원금의 일정량을 떼어주는 것이죠. 부모님이 미리 남한에 가 있으면 아이들에게 보내주는 돈으로 가는 방법도 있고 난민이 되면 원하는 나라로 보내주기도 하니 몽골까지 가서 남한에 가는 방법도 있고요. 저는 베트남을 거쳐 태국에 있는 한국대사관에서 남한으로 가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태국까지 가려면 돈이 필요하잖아요. 구걸하고 쓰리를 해서 돈을 모은 기간이 일 년이었어요. 기차를 타고 서안과 라싸를 지나 베트남 근처 강가까지 왔죠. 밤이 되면 몰래 베트남에 가는 배가 왔다 갔다 해요. 저도 밀수꾼에게 돈을 주고 베트남에 도착했어요. 베트남도 공산국가이니 잡히면 바로 북송되거든요. 그래서 중국 여행객인 척 지도를 보여주고 물어물어 하노이까지 오는데 열흘이 걸렸어요. 단속이 심한데다가 중국인인 걸 증명할 수 있는 여권도 없으니 산에서 잠자고 생활하며 산을 통해 태국으로 갔어요. 위험이 제일 컸던 세 달 간의 고행길이었죠.

태국에 도착하면 한국 대사관에서 신원 확인을 해요. 한국에 도착하면 국정원에서 약 한달 간 조사를 받는데 거짓말 탐지기까지 동원돼요. 하지만 태국에서는 그렇게까지 안 하고 간첩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어떻게 국경을 넘어왔는지 탈북과정을 묻습니다. 태국에 있는 한국 대사관에서 여권을 준비해주는데 이러한 준비과정이 끝나면 드디어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오는 거죠. 비행기에서 내리니 다리에 힘이 쭉 풀렸어요. 배가 너무 고파 집을 나왔는데 남한까지 올 줄은 몰랐어요. 제가 16살에 남한에 도착했으니 이곳 생활도 벌써 10년이 다 돼가네요. 저는 방황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삶을 위해 준비하는 중이에요. 저희를 마냥 나쁘게 보기보다는 이해해주려고 노력해주셨으면 해요.

※  이 글은 우리대학에 재학 중인 새터민 학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기자가 정리한 것입니다.


정리_ 이설화 기자 lsha22c@uos.ac.kr
사진_ 영화 <크로싱>, 구글 지도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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