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걸릴 것 같다”, “자살하고 싶다“. 조금만 힘들어도 우리는 이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힘든 감정을 표출할 수는 있지만 그 감정을 표출하는 언어가 모두 ‘죽음’과 관련된 단어와 함께 쓰인다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지 보여준다. 

부끄럽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가장 많이 하던 소리였기도 했다. 힘들면 그냥 ‘죽고 싶다’, ‘자살하고 싶다’고 외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나였다. 하지만 할머니께서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부터 그동안 나의 행동이 얼마나 경박했던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건강하시던 할머니가 위암 4기에 걸리셨다는 소식은 정말 청천벽력이었다. 앞으로 살 날은 환자가 가진 의지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사의 말이 너무 야속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항상 나를 보면 “아이구 우리 손주, 항상 건강이 최우선이여. 손주만 건강하면 이 할미는 더 바랄게 없어”라고 말씀하시던 할머니. 할머니 자신의 건강이 망가져 가는 과정에서도 나만을 걱정해주시던 할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아른거려 눈시울이 붉어진다.

사실 글을 쓰는 이 순간도 두렵다. 괜히 이 글을 쓰게 돼 할머니의 건강이 더 악화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람들의 인식이 전환됐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우리가 죽음에 관련된 말을 쉽게 툭툭 내뱉으며 버리고 있는 삶의 가치가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갈망했던 자신의, 혹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사람의 ‘마지막 잎새’일 수도 있다. 눈앞에 다가오지 않아서 그런지, 혹은 경험해보지 않아서 그런지 ‘죽음’은 절대 쉽게 내뱉으면 안 되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배고프다’보다 더 자주 쓰는 단어가 돼 버렸다.

나는 친구들에게 “자살하고 싶다”, “암 걸릴 것 같다”는 말을 금지어로 하자고 요청했다. 나부터 바뀌어야 남들도 바뀔 것이라는 생각에 아무리 힘들어도 그런 말들을 절대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이후 아무리 힘든 상황 속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많이 찾을 수 있는  것은 기분 탓만이 아닐 것이다. 억지로 힘든 것을 숨기려는 것이 아닌, 말 그대로 친구들 사이에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난다는 것이다. 그 두 단어가 없어진 모임에서는 사소한 것에도 웃는 등 웃음이 넘쳐난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미치는 파급력이 엄청나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로 미뤄봤을 때 죽음이라는 단어가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져야 할 단어일까? 조금 더 고민을 해본다면 답은 나와 있다.


정수환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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