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각국이 동유럽의 작은 땅인 크림반도에 이목을 집중하고 있다. 원래 우크라이나의 영토였던 이곳은 얼마 전 벌어진 사건들로 인해 사실상 러시아에 편입됐다. 갑작스런 사태에 우크라이나는 별 힘도 써보지 못하고 자신의 영토를 빼앗겼다. 그야말로 눈뜨고 코 베인 꼴이 돼버린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사태가 일어나게 됐을까?

우리가 한창 동계올림픽의 열기에 취해있을 무렵 우크라이나는 대규모 시위로 인해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혼란 한 상황에서 러시아는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러시아계 사람들이 거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크림반도에 군대를 투입했다. 우크라이나의 영토였지만 정치적 갈등으로 자치적인 정부를 가지고 있던 크림반도는 러시아의 군대가 들어온 후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분리를 결정하는 투표를 했고 투표결과 95%의 찬성으로 러시아와 합병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러시아는 이를 승낙하고 크림반도는 사실상 러시아의 영토가 됐다.


크림반도를 지배하는 현실주의

현실주의는 국가 간 관계에 있어 힘의 논리를 중시한다. 현실주의자에게 국가는 자신들의 생존과 이익만을 추구하며 움직일 뿐이다. 현실주의자들은 국제관계에 있어서 이상적인 협력관계란 존재할 수 없다고 보고 힘의 논리가 통용되는 상황을 가정한다. 이번 크림반도 사태에서 나타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를 통해 이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는 부동항(不凍港)에 대한 열망과 지중해로 진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고,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이라는 지역은 러시아의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적절한 장소였다. 크림반도의 풍부한 자원 또한 러시아의 구미를 당기게 했다. 이처럼 크림반도의 병합은 러시아에게 확실한 이득을 가져다준다. 이런 사실은 우크라이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크라이나에게도 크림반도의 풍부한 자원은 분명 이득이 된다. 하지만 크림반도를 차지한 것은 러시아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보다 상대적으로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강력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국가가 이득을 취하는 것도 국가의 존속이 전제됐을 때 가능한 얘기다. 우크라이나가 크림반도의 강력한 군사적 대응을 했다가는 국가의 존재 자체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냉혹한 현실 속에서도 도덕은 유효하다. 강한 힘을 가졌다고 해서 무법자 같은 행보를 보이면 안된다는 얘기다. 현실주의는 행위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정한다. 러시아 측에서 크림반도를 병합한 자신의 행동에 그토록 정당성을 찾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과연 크림반도 사태는 정당한가? 이번 사태를 러시아는 정당화하고 우크라이나는 사태를 비판한다. 두 나라에게는 각자 나름의 이유가 있다. 러시아는 주민 대다수가 러시아계이므로 합병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합병 투표 결과 95%에 가까운 압도적인 찬성표는 러시아의 주장에 힘을 더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도 할 말은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양국이 크림반도에 배치할 수 있는 병력과 움직임을 제한하는 협정을 맺었는데, 러시아는 이 협정을 무시하고 무작정 군대를 투입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투표의 선택지는 단 두 가지로 ‘러시아로의 편입’과 ‘우크라이나에 남지만 조금 더 독자적인 정부 수립’ 뿐이었다. 이런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크림반도는 기본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영토다. 따라서 이곳은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에 대한 결정은 모두 우크라이나 정부 주관의 국민 투표로만 할 수가 있다”는 우크라이나 헌법의 영향을 받는데 이번 사태는 그것과 정면으로 배치돼 정당성이 없다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주장이다.

위와 같은 두 나라 사이의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크림반도는 러시아의 품에 들어갔다. 우크라이나는 이에 대해 비판을 하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다. 현실주의 이론으로 설명하자면 국가 차원에서 볼 때 도덕과 정치적 성공 간에는 별 상관관계가 없다. 도덕의 중요성은 인정하지만 국가의 행동은 도덕적 문제보다 정치적 결과에 따라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 보자면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를 잃어 손해를 봤고 러시아는 이익을 얻었을 뿐이다.


▲ 우크라이나의 지도. 우크라이나는 크게 러시아계 사람들이 많은 동부와 우크라이나인들이 많은 서부로 나뉘는데, 이 두지역 사이에는 지속적인 갈등이 존재했다. 이들간의 갈등은 결국 크림반도를 러시아에 편입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통해 흑해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고 천연자원을 얻는 등의 이익을 보게 된다. 
 

현실에 무릎꿇은 이상주의

이상주의는 현실적인 일보다 바람직한 일을 중시한다. 이들은 모든 인류가 추구해야 할 ‘이상적인 상태’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주의자들은 국제기구, 규범, 국제여론 등의 국가 간 상호작용을 통해 이 이상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다. 국제연맹규약을 기초한 영국의 정치가 세실은 “국제여론은 국제연맹의 가장 효과적인 제재수단이고, 호전적 국가의 행동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세계 시민들의 목소리”라고 주장했다.
유럽 연합과 미국 등의 서방 국가들은 러시아의 행동을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행위”라며 비난하고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에 반대했다. 굳이 서방 국가들이 아니더라도 러시아는 많은 국가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국제질서가 잘 유지되는 평화로운 상태가 이상적이란 것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실이다. 이상주의적 시각에서 보자면 수많은 국가들이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러시아를 막아 질서를 지키는 것이 옳은 행동이다. 실제로 얼마 전에 열린 헤이그 핵 안보회의에서 러시아를 G8에서 제외하는 제재가 가해지기도 했다.

G8은 서방의 선진 7개국과 러시아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더 적극적인 제재를 통해 러시아를 막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러시아와 서방 국가들은 사실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서방세계에 있어 러시아가 생산하는 천연가스는 매우 중요하다. 러시아는 세계 1위의 천연가스 생산국이다. 독일의 경우 자국의 에너지 사용 35% 정도를 러시아의 천연가스에 의존하고 있고 세계 각지의 많은 국가들도 러시아의 천연가스를 소비하고 있다. 만일 러시아가 천연가스 수출을 금지한다면 많은 국가들은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 계산적으로 따져보자면 확실히 다른 국가들이 우크라이나를 돕는 것은 그들에게 별 이득이 되지 않는다.

미국이 대서양을 건너와 우크라이나를 돕는다 해도 그 비용을 능가하는 이득을 얻어낼 수 있는지는 미지수고, 유럽연합 또한 러시아와 전면전을 벌여봐야 서로에게 손해만 갈 뿐이다. 이것이 입으로는 러시아를 규탄하지만 사실상 ‘강 건너 불 구경’ 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서방 국가들의 현 입장이다. 국제여론의 영향력이라는 것도 실제 세계에선 이처럼 미미하기만 하다.

대의가 아닌 실리를 택한 서방세계를 마냥 비난만 할 수는 없다. 현실주의 이론에 따르면 개인 차원의 도덕은 국가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한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도덕적 행동을 포기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를 비난할 것이다. 개인은 도덕적 원칙을 위해 때로는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 위와 같은 논리는 통하지 않는다.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국가에겐 존경 대신 그 국가의 선택에 의문부호를 보내며 측은한 시선만 보낼 뿐이다. 결국 러시아와 서방 국가들의 관계에서도 현실주의적 상황을 보게 된다. 서방 국가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크림반도 사태의 해결과 국제질서의 유지보다는 당장 자신들의 손 안에 있는 이익이다. 이들은 바람직한 일보다 현실적인 이익을 택했다.

1차대전 이후 널리 퍼진 이상주의는 세계의 평화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안타깝게도 2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이 발생했고, 이후 현실주의에게 국제관계 주류 이론으로서의 주도권을 넘기게 된다. 그후 이상주의는 탈냉전시대를 맞으며 다시금 필요성을 인정받았지만 현실주의에 무릎을 꿇는 모습은 크림반도에서 되풀이됐다.


김준태 기자 ehsjfems@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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