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군은 지금의 미주아파트 자리에 진지를 쌓고, 배봉산으로 올라온 아군과 교전하며 사흘 밤낮 동안 서로 기관총을 쏘는데, 밤에는 온 하늘이 양쪽에서 쏘는 탄환 불빛으로 벌겋게 물들었고, 지하 방공호에 숨어있지만 총소리가 심하여 끝난 후에도 며칠 동안 귀가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_ 한국개발연구원 「케이디언즈」 발췌

일제시대에 지어진 자작마루 지하에 작은 공간이 있습니다. 옛날에 이곳은 전시 대비용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정확한 용도를 알기 위해 우리대학 관련 부서와 동대문구청에 수소문해 봤지만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마 이곳이 방공호나 벙커, 전쟁용 물품을 보관하던 장소가 아닐까 추측 해볼 수 있습니다.

1930년대 당시에는 일반 건축기술에 없던 콘크리트 기술로 자작마루 지하가 건축됐다는 점도 특이합니다. 우리대학에서 발간한 ‘서울시립대학교 90년사’에는 전쟁을 겪은 우리대학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인민군이 우리대학 기숙사를 훈련소로 사용했고, 배봉산 근처가 집중 포화를 받아 수많은 교내 건물이 파괴됐으며, 휴전 후에도 미군이 학교를 점령해 군사 사무를 맡아봤다는 역사입니다. 일부 학생들이 북한 인민군에게 징집돼 전선에 투입됐다는 사실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청량리가 교통과 보급의 중심지였으며 배봉산이 전술적 거점이었기 때문에 겪게 된 일이라고 합니다. 100주년을 앞둔 우리대학은 그 자체로도 역사의 산 증거로 우리에게 남아있습니다.


이철규 기자 279@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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