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끝나지 않을 이야기, 라디오

주파수가 잘 터지는 조용한 곳으로 가 정각을 알리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는다. 책상에 펴둔 책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고 DJ의 말 한 마디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한다. 중간 중간 마음에 드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메모를 하기도 한다. 이런 경험은 이제 현재보다 과거에 가까운 일들이 됐다. 우리에게 이런 추억을 만들어 준 라디오는 과연 언제고 건재할 수 있을까. 지난 9일 FM라디오 개국과 그 역사의 시작을 함께한 <밤을 잊은 그대에게>가 5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지금 많은 사람들이 라디오의 위기에 대해 얘기한다. 이제는 꼭 라디오가 아니어도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내 취향에 맞는 음악을 추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라디오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라디오가 과거의 유물로만 느껴지는 당신에게 그 ‘무언가’를 글로나마 전한다. -편집자주-

 “내일도 저와 키스하실 거죠?” <데니의 키스 더 라디오>의 마침 인사이다. 선선한 밤공기를 뚫고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는 언제나 감성적이다. 학창시절 누구나 한 번쯤 라디오를 들어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방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거나 교실에서 자율학습을 하고 있을 때 DJ의 따뜻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지루하게 느껴졌던 시간이 눈 깜짝 할 새 흘러가버리곤 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 바쁜 나날을 지내다 보니 그때의 라디오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나를 웃기기도, 울리기도 했던 그 시절의 라디오는 어떤 존재였을까?


친구 같은 라디오

라디오는 ‘함께 시간을 보낸 재밌는 친구 같은 존재’였다고 이서호(세무 14)씨는 말한다. 그가 라디오를 챙겨듣기 시작한 것은 재수 준비를 하면서부터였다.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과 쉽게 소통을 하지 못하던 재수 시절, 라디오는 그에게 유쾌한 친구였다. “재수를 하면 고3 때보다 더 많이 지치고 공부에 대한 슬럼프가 올 때도 많다고 해요. 힘들 때마다 들었던 라디오 덕분에 다른 친구들에 비해 큰 슬럼프 없이 공부를 할 수 있었어요. 특히 시험성적이 좋지 않아 우울할 때 라디오를 들으면서 웃다 보면 성적에 대한 고민을 금방 잊고 공부에 다시 집중할 수 있었어요”라고 이서호 씨는 말했다. 또한 “학원 자습실에 200명 정도의 학생들이 모여서 공부를 했어요. 하루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사연이 정말 재밌었는데, 같은 방송을 듣고 있던 학생들이 다 같이 웃음을 터트렸죠. 웃은 학생이 정말 많아서 감독 선생님께 혼이 났어요”라며 라디오에 대한 추억을 회상했다.

라디오를 듣는 것이 습관이 돼버린 사람도 있다. 안지윤(24)씨는 혼자 있는 시간이 외로워서 라디오를 찾게 됐다. 그녀가 가장 즐겨 들은 라디오는 <장기하의 대단한 라디오>이다. 그녀는 “텅 빈 자취방에 혼자 있으면 많이 무섭고 외로워요. 라디오를 듣고 있으면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 느낌이 들어요. DJ들의 따뜻한 목소리가 공허한 방을 든든하게 채워줘서 라디오를 들을 때 만큼은 외롭지 않아요”라며 라디오를 듣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신희은(21)씨는 고등학교 시절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푸른 밤, 성시경입니다>을 들었다. “하굣길에 성시경 DJ의 목소리에 괜히 설레었죠. 특유의 지적인 멘트들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마무리 인사인 ‘잘자요’가 가장 기억에 남네요”라며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기쁨을 전해주는 라디오

한편 김지현(행정 13)씨는 라디오를 “깜짝 선물을 안겨줬던 기쁨과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슈퍼주니어의 키스 더 라디오>를 즐겨들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받은 선물들은 덤이었다. 그가 받은 선물은 신발 상품권과 신화 콘서트 티켓이었다. “상품을 받을 기회가 평소에는 별로 없잖아요. 라디오는 거의 매일 간식이나 선물을 보내주기 때문에 당첨 확률이 더 높은 것 같아요. 또한 긴 사연이 아닌 간단한 문자나 인터넷 메시지 등으로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라며 긍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또한 그는 라디오가 나눔의 기쁨을 준다고 말했다. “혼자 먹고 쓰겠다는 사연을 보낸 사람에게 선물을 주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어요. ‘선물을 통해 가족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 반 친구들과 함께 나눠 먹고 싶다’는 사연을 보낸 청취자들이 주로 선물을 받더라고요. 다른 사람들과 선물을 나눔으로써 청취자들이 또 다른 기쁨을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함인 것 같아요. 저도 신화 팬인 친구에게 콘서트 티켓을 주면서 뿌듯하고 기뻤던 생각이 나네요”라며 웃음을 보였다.

라디오 공개방송 방청을 통해 기쁨을 찾는 사람도 있다. 중학생 때부터 라디오를 즐겨 들어온 정소현(행정 13)씨는 세 번의 신청 끝에 <2시 탈출 컬투쇼>를 방청할 수 있었다. 그는 “DJ들이 사연을 읽고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습을 눈으로 직접 보니 듣기만 하는 라디오랑은 느낌이 색달랐어요. 리허설도 굉장히 자주하고 가수가 노래 라이브를 잘하지 못하면 몇 번이고 다시 하더라고요. 제가 듣는 라디오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라며 방청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어 “광고가 나가는 시간에도 바람잡이 개그맨이 나와서 방청객들에게 다양한 이벤트를 해줬어요. 저도 식당 할인권을 받았었죠. 방청객이 지루하지 않게 배려해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컬투의 유머를 실제로 들으니 더 재밌게 즐길 수 있었고 쌓였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 들었어요”라며 라디오 방청의 매력을 설명했다.


지친 나를 위로해주는 라디오

누군가에게는 라디오가 ‘혼자가 아님을 알려주고 나를 위로해주는 존재’가 되기도 했다. 정서영(21)씨는 중·고등학생 때 진로 문제 등으로 인해 부모님과의 갈등이 생겨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우울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방에서 몇 시간 동안 라디오를 들으며 스트레스를 풀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하고, 별 것 아닌 문제였지만 당시엔 상당히 심각한 문제들이었죠. 저에겐 라디오가 유일하게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상대였어요”라며 라디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또래들이 많이 듣는 라디오라서 공감되는 사연이 굉장히 많았어요. 제가 부모님과 갈등이 있었던 때라 ‘아빠에게 혼이 났다, 부모님이 내 의견을 무시한다’와 같이 부모님과 관련된 사연엔 정말 내 이야기인 듯 공감했어요. 또 그러한 문제가 나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라며 그때를 떠올렸다.

라디오를 통해 학교 폭력의 상처를 이겨낸 우리대학 학생 A씨도 있다. 당시 그는 친한 친구들과 연락을 하지 못했고. 그는 힘든 시간을 혼자 견뎌내야 했다. 자살까지 시도하려 했던 그를 잡아준 것은 라디오였다. 그는 “<UN 최정원의 감성시대>를 주로 들었어요. DJ가 ‘오늘 하루 어땠나요, 잘지냈나요’ 하고 묻는데 울컥하더라구요. 당시엔 제게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거든요”라고 말했다. 이처럼 라디오는 그에게 따뜻하고, 언제나 자리를 지켜주는 친구였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그는 심적으로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학교 폭력이 남긴 상처들을 천천히 치유할 수 있었다. 그는 “저에게 라디오는 가장 힘들 때 힘이 되어준 친구와 같기 때문에 어떤 것보다 의미가 특별해요”라며 라디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이렇게 라디오는 우리에게 유쾌한 친구이기도, 선물을 전해주는 기쁜 존재이기도, 힘들 때 위로를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오래된, 정든 친구이기도 하지만 라디오는 다시 만났을 때 더 새롭고 재밌는 친구이지 않을까? 라디오는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당신을 반겨줄 것이다.


유지현 수습기자 wlgus2304@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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