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의 윤리적 부재
심각한 사회적 해악 끼칠수도


언제나처럼 아침 식탁에서 조간신문을 보는데 눈에 띄는 기사가 있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관련자 10여명이 국방부를 상대로 밀린 군인연금을 지급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들은 1997년 4월 12·12 군사반란 모의, 참여죄 등으로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내란죄 등을 범해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경우에는 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법률에 따라 그때부터 군인연금 지급이 중단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 법률(군인연금법)이 위헌이라는 제청과 국방부의 연금지급거부 취소소송을 함께 냈다는 것이다(『조선일보』, 2014.5.6).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들이 소송에 이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국가를 전복하려는 모의를 하고 또 그를 실행한 자들로서 만일 이런 자들에게 연금이 지급된다면 결과적으로 반란범에게 이익을 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대체 왜 이런 한 눈에 보기에도 무리한 소송을 제기한 것일까? 아마도 ‘돈’ 때문이었을 것이다. 5, 6공 군사정부에서 출세 가도를 달린 이들은 모두 장성급 이상으로 전역했다. 따라서 만의 하나 소송에 이겨서 17년간 밀린 연금을 받는다면 상당한 액수일 것으로 짐작된다. 필자가 예단할 수 있는 바는 아니지만, 아마도 이 ‘돈’에 대한 욕심이 이들을 이런 무리하고 뻔뻔해 보이는 소송으로 이끌지 않았을까.

한국근대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이 기사를 보며 박두영(1880∼1960)이라는 인물을 떠올렸다. 박두영이 누구인가? 대한제국의 군사 유학생으로 1903년 일본 육사를 15기로 졸업한 그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 이후에도 일본군에 남아 1931년까지 복무했다. 포병 대좌로 예편한 후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임명하는 명예직인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일본군 고급 장교 출신답게 각종 전쟁 선동 강연, 기고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그리고 광복 후 완전히 잊어진 인물이 된 박두영의 이름이 다시 한 번 세간에 오르내리는 것은 1959년의 일이다. 광복과 더불어 끊어진 일본 정부의 ‘은급’(연금)을 청구하러 가겠다며 “팔십 노인”으로서 외무부에 일본행 여권을 신청했던 것이다(『동아일보』, 1959.11.28). 우스운 일처럼 보이지만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짐작하건대 그에게 식민지시기의 일본군 복무란 단지 ‘직업’이었던게 아닐까. 그러므로 박두영은 일본인과 공평하게 일본 정부의 연금을 받을 권리가 본인에게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50여년 전의 박두영, 그리고 2014년의 12·12 군사반란 관련자들에게 공히 부재한 것은 무엇일까. 간단하게 말하자면 정상적인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반성의 윤리’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감각의 부재는 자기는 진지하지만 남들에게는 어이 없는 희극으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단지 코메디에 그치지 않고, 심각한 사회적 해악을 끼칠 때도 있다. 12·12 군사반란에서 비롯된 ‘역사’가 그랬던 것처럼.


염복규(국사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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