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유럽 여행 수기

헝가리의 지하철 1호선은 정말 낡아빠졌다. 열차는 네 칸 남짓으로 짧고 폭도 아주 좁다. 지하철의 외관은 과속방지턱 색처럼 노란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져 언뜻 보면 불도저가 줄줄이 연결돼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무식하게 생긴 열차는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지지직’거리며 찢어지는 듯 벨소리가 울렸는데 그 탓에 정거장에 도착할 때마다 귀가 아팠다. 지하철이 지나가는 터널에는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고, 터널의 둘레도 아주 가늘었다.

이런 컴컴한 창자 속 같은 곳을 지나다가 자칫 열차 몸체가 벽에 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열차는 매번 급출발에 급정거해서 몸은 제대로 가누기 힘들 정도로 휘청거렸다. 뭐 하나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지하철 주제에 가격은 350포린트(한화 약 1750원)로 비싼 편이어서 탈 때마다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헝가리 여행이 끝나갈 즈음 옆에 있던 동료 기자가 말했다. “그거 알아? 이 지하철 노선이 유럽에서 제일 처음으로 만들어 졌대.” 아니 이게 웬 말?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역사 깊은 ‘유럽 지하철 1세’를 불도저 같다며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이 불도저들은 완전히 달리 보였다. 깜깜하고 좁은 터널은 옛 유럽의 오래된 광산처럼 보였고 시끄럽게 울리는 부저 소리는 투박하지만 못 들어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급출발 때 붙잡았던 열차 천장의 투박한 가죽 손잡이에서도, 덜컹거리는 부저 소리에서도 당시 유럽의 역사와 기술력이 엿보였다. 열차에서 내리며 나는 생각했다. ‘이래서 여행은 제대로 알고, 천천히 해야 하는구나.’

이번 동유럽 18일간의 여정 동안 네 개 나라, 아홉 개 도시를 돌면서 이동시간만 수십 시간이 걸렸다. 천천히 볼 시간도 부족했지만 처음 가보는 동유럽이라는 설렘에 좀 더 많이 보고싶어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래서 체코와 헝가리에서는 아쉽게도 깊은 사색 없이 눈요기뿐인 여행을 했다. 동료의 말이 아니었다면 헝가리 지하철도 어쩌면 그저 가격만 비싼 고물 열차 정도로 기억에 남았을지 모른다. 이 밖에도 내가 놓친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아쉬움이 남은 여행이었다.

흔히들 “너무 바삐 돌아다니는 여행에서는 남는 것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뻔히 알고서도 이런 실수를 했던 이유는 동유럽이 내 기분을 너무 들뜨게 해서였다. 다행히도 헝가리까지의 여행길은 전체 일정의 처음 절반이었고, 남은 절반의 여행지인 크로아티아와 오스트리아는 조금 더 세밀히 관찰하자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작은 동상이라도 어떤 사연으로 저기 서 있는 것인지 궁금해했고, 비슷해 보이는 거리도 다른 곳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비교하게 됐다.

 
덕분에 합스부르크 왕가가 신성로마제국시대에 유럽 전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다는 유럽사를 곳곳에 서있는 카를 황제의 동상을 보며 알 수 있었고, 발걸음이 멈춘 어느 마을에서는 가로등 대신 걸어놓은 횃불이 주는 따뜻한 온기가 좋아 같은 거리를 수차례 돌기도 했다. 돈도 시간도 부족하겠지만, 여행자는 계획을 좀 느슨하게 잡아야 방문한 곳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다는 것을 나도 실수를 통해 배웠다.


이철규 기자 279@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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