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주년 특집

1969년 2월 1일. 박농대의 일기

▲ 위에서부터 차례로 1969년 우리대학 학보에 실렸던 신입생 모집요강, 농업경영학과 모내기|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 90년사

오늘은 서울농업대학에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왔다. 난생 처음 배를 타고 인천항을 밟았다. 한강 나룻배로 광나루까지 꽤나 걸렸음에도 서울에 왔다는 설렘 때문인지 배멀미 한 번 하지 않았다. 광나루에서 청량리까지는 또 다시 한참이었다. 멀기는 했지만 서울 구경에 들떠 걷다 보니 지루할 틈이 없더라. 역시 사람은 서울에 살아야 멋쟁이지. 서울은 길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자동차(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시발’은 1955년부터 다니기 시작)가 있다. 아무리 봐도 볼 때마다 신기하다. 귀신이 씌었나 어찌 인력거꾼도 마차꾼도 없이 혼자 굴러가는지. 나도 저 자동차 한 번 타봤으면….

서울농업대학 교무과에 도착해서 입학원서를 꺼내 몇 번이고 다시 봤다. 내가 무슨 정신으로 이 원서를 썼는지 모르겠다. 모집학과란에는 몇 번이나 고심한 흔적이 고대로다. 글자를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얼룩져 있는 칸. 나는 수의학과에 진학해 수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교편을 잡길 원하시는 어머님과 농업 대지주가 되길 원하시는 아버님의 뜻에 따라 농공학과를 썼다. 농공학과는 교직 이수과정도 있기 때문이다. 나도 우리 선생님처럼 그런 근사한 어른이 되려나, 집에서 기껏 잡초나 뽑고 거머리나 잡던 내가 농업 대지주라니…. 어느 쪽이든 폼이 제법 난다. 퍽 마음에 든다. 그러고 보니 옆집 갑수는 잠사학과(섬유, 옷, 비단 등의 제작을 배우는 학과, 현재의 섬유공학과)를 썼다는데 벌레라면 질색을 하는 놈이 누에는 어떻게 만지려나 모르겠다. 갑수는 언제 입학원서를 내려나? 같이 서울에 올라올 걸 그랬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서울이라 학교 구경도 공들여 했다. 도서관, 표본 대온실, 수리학실험실 등 사방이 커다랗고 키가 큰 건물들이었다. 캠퍼스 곳곳을 다니다 보니 마치 나도 엘리트가 된 기분(!). 그나저나 대학교에 웬 공놀이 하는 애들이 많기에 희한하다 여겼더니 근처에 휘경국민학교가 있단다. 고작 구구단이나 외울 국민학생들인데 서울 애랍시고 제법 세련된 테가 난다. 남자애들도 곱상하고 허여멀건 것이 요상하면서도 부러웠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다니다 본관 회의실(현 경농관)에 다다랐는데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벤치에 앉아있었다. 가까이 가 말을 붙여보니 저도 나처럼 입학원서를 제출하고 학교를 둘러보는 중이었단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눈도 큰 것이 무척이나 고와보였다. 이름은 숙희였다. 숙희, 숙희, 숙희…. 같이 농장, 연습림, 온실, 사료견본원 등을 돌아다니며 대학에 붙으면 어떤 것들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숙희는 문학이 좋아 대학에 입학하게 되면 동인지(1962년 서울농업대학 동인지 「흙」) 활동을 하고 싶다고 했다. 덜컥 나도 글 쓰는 것이 좋아 학보사(1964년 서울농업대학 농대신문 창간)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숙희는 무언가 말이 잘 통하는 게 제법 신여성의 테가 났다. 헤어지기 전 무슨 과를 지원했는지 물었다. 농공학과를 지원했더란다. 지화자! 역시 부모님 말씀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기는 법이다.


1986년 11월 4일 김시위의 일기

▲ 서울시립대신문에 실린 건대항쟁 기사
오늘은 이른 아침부터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어깨의 통증을 참으며 힘겹게 일어나 받은 전화에서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명수형의 병세가 호전됐다는 소식이었다. 며칠 전 명수형의 병세가 악화돼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됐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마음이 무겁던 상태였다. 그동안 전전긍긍하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평화로워졌다. 비록 병세가 호전됐다고는 하나 손과 얼굴에 남은 화상자국은 아마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곧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겠지…. 막무가내로 사과탄(손으로 던질 수 있도록 만든, 사과 모양의 최루탄)을 던진 경찰들 때문에 명수형은 들고 있던 화염병을 놓쳤고 그 과정에서 화상까지 입었다. 나 또한 그때 다친 어깨 때문에 어젯밤부터 방 안에 누워만 있었다. 어깨뿐만 아니라 팔, 다리 할 것 없이 멍이 들었다.

 지난달 28일부터 있었던 나흘간의 투쟁*, 아직도 그 날의 기억은 악몽처럼 남아있다. 경찰들이 만든 함정에 속아 넘어가 결국 많은 학우들이 위험에 빠졌다. 발족식을 치르던 날 어찌된 일인지 건대 출입문을 봉쇄한 경찰들이 아무런 검문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함을 느끼며 발족식을 거행하던 중 갑자기 경찰들이 학우들에게 달려들었고 학우들은 정신없이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한 점은 경찰들이 그때 우리들을 검거하는 대신 건물 안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애학투련(「전국 반외세 반독재 애국학생 투쟁연합」을 이르는 말로, 대규모 연대투쟁을 전개할 목적으로 결성돼 1986년 11월 28일 건국대학교에서 발족식을 함) 학생들은 경찰들이 물러나면 자진해산할 것이라고 말했으나 경찰은 건물을 봉쇄한 채 전기도 끊고 물도 끊어 버렸다. 여학생과 1학년 학생들만이라도 탈출시키려 노력했지만 지친 몸으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다친 몸으로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던 학우들은 결국 마지막 날 전투경찰에게 연행돼 끌려갔다. 그들은 우리 세력을 와해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나 강경히 나왔던 것이다. 우리가 지치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그곳에서 도망치지 못했다면 나 역시 그들처럼 끌려가 경찰의 취조를 받고 취조실에서 빨갱이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우리 학우들 중에 이번에 건대 집회에 참여했다가 구속된 사람만 해도 68명이다. 연행됐던 1천 5백 명의 학생들 중 구속된 사람 수는 1천 2백 명이 훌쩍 넘는다. 그들은 지금쯤 난방도 잘 되지 않는 감방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것이다. 잡혀가서 고생하고 있을 학우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다. 내일은 잡혀간 애학투련 학우들을 위해 건대투쟁의 해명을 요구하는 규탄대회를 갖기로 했다. 아픈 몸을 얼른 추슬러야겠다.

*10·28 건국대학교 사건
반외세 자주화, 반독재 민주화, 조국 통일의 3대 구호를 내걸고, 1986년 10월 28일부터 31일까지 건대학교에서 전개된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이다. 건국대 사태 혹은 건국대 항쟁이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러한 점거농성은 작전명 황소30이라 명명된 경찰의 입체 진압작전에 의해 강제 해산됐으며, 1525명이 연행되고 이중 1288명이 구속됐다.


1993년 11월 17일. 정만술의 일기

▲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모뎀을 소개하는 기사, 자기부상열차 개발 광고, 삼성 컴퓨터 ‘데스크마스타 486’ 광고
오늘은 출혈이 크다. 5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모뎀이라는 것을 구입했다. 천리안. 천리를 내다보는 눈. 이름이 멋지지 않은가. 멋있는 척 영어를 덕지덕지 발라 만든 이름 Hitel, C-serve같은 것들보다 훨씬 마음에 들어 골랐다. 게다가 5만 원짜리! 옛다. 기왕 사는 것 내장형으로 비싼 놈을 골랐다. 컴퓨터도 200MB의 대용량 HDD를 내장한 빠릿빠릿한 삼성 데스크마스타 486으로 택했다.

주변기기도 그럴싸한 것으로 장만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뎀을 설치하기 위해 직원을 불렀다. 근데 글쎄 그 직원 태도가 정말 가관이었다. 앞으로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괜찮겠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상당히 건방졌다. 우리 아버지가 현대에 다닌다. 한 달에 18,000원? 짜장면 10그릇밖에 안 된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 회사가 자기부상열차인지 뭔지 바퀴 없이 날아다니는 기차를 만들었다. 근데 날아다니는 것이 왜 기차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모르겠다. 비행기나 헬리콥터처럼 하늘 여기저기를 날아다니지는 않는 건가? 좋은 점은 공해, 소음, 진동 같은 것이 전혀 없다고 한다.

이 열차가 대전 엑스포*에서 공개됐다는데 이것이 잘만 되면 짜장면은 먹고 싶지도 않을 만큼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대전 엑스포는 참 재밌었다. 눈앞에 그림자처럼 사람이 생기지를 않나, 내 얼굴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바꾸질 않나. 나도 글자 놀음 말고 과학을 배울 것을 그랬다. 몇 달 전에 우리 국문과의 자랑 이동하 교수님께서 서울시립대신문에 사설을 쓰셨다.

우리의 ‘생명’과 ‘정신’은 기계론적인 근대과학 따위가 접근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넘어섰다고 하셨다. 나는 이동하 교수님을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근대과학 따위라니, 교수님의 이번 사설에는 조금 동의할 수 없다. 과학은 최고의 학문이다. 다만 요즈음에는 점점 무서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미래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 사이보그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 한다. <쥬라기공원>에나 나오는 소설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가능하다고 한다. 나랑 똑같은 사람이 있다니 정말 섬뜩하다. 과학이 최고의 학문이라지만 인간에 피해를 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선 안 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이동하 교수님의 말도 이해가 된다. 역시 이동하 교수님. 내일 수업 또한 경청해야겠다.

*대전 엑스포
대전에서 1993년 8월 7일부터 약 3달간 개최된 세계 박람회. 개발도상국에서는 처음 개최된 것이다. 홀로그램, 갈락티파스(터치스크린을 이용해 사람을 변형시키는 프로그램), 뉴로컴퓨터 등이 선보여졌다.

 

*위 글들은 우리대학 학보에 실렸던 기사를 바탕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서현준 기자 ggseossiwkd@uos.ac.kr
유예지 기자 yy0237@uos.ac.kr
김민기 기자 mickey@uos.ac.kr
장한빛 기자 hanbitive@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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