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삶의 기초단위는 상호행위이고 상호행위는 신뢰라는 도덕적 기반 위에서만 가능하다. 신뢰는 특정 사태에 대한 상호행위 참여자들의 주관적 믿음이 서로 일치하고, 이러한 공통 신념에 따른 행위가 상호행위 당사자로부터 합리적으로 기대되며, 그 기대가 상호행위 당사자들 사이에서 규범적 구속력을 지닐 때 비로소 사회적 행위의 정당 근거가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한 마디로 규정하라면 ‘신뢰의 위기’란 말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선거를 포함한 모든 게임은 우선 게임 규칙에 대한 믿음이 서로 일치하고 그에 따른 행동이 합리적으로 예측될 수 있으며, 또 마땅히 그렇게 행동해야 믿음직스러운 것이 된다. 남몰래 반칙을 동원하여 게임에 이긴다면, 이는 처음부터 그 게임을 불신의 늪에 빠트리는 꼴이 되고 만다. 어디 지난 대통령 선거뿐이랴. 해결의 실마리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세월호 사건은 설상가상이다. 정치꾼들의 이전투구는 그렇다 치더라도, 생떼 같은 어린 학생들의 비극적인 죽음을 대하는 대통령의 유체이탈법 언행은 신뢰의 위기에 부채질하는 격이다. 언제라도 유가족을 만나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은 지방선거 후 공수표가 되었다. 사고만 터지면 은폐와 조작을 일삼는 행위는 군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학교, 직장, 심지어 가장 신성해야 할 종교 조직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모든 조직에 만연해 있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누구를 신뢰하겠는가. 이른바 사회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의 부조리와 부도덕을, 그리고 이를 은폐, 조작하는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일소하지 않는 한 신뢰의 위기는 극복될 수 없다. 극복은커녕 위기를 위기로 인지조차 할 수 없는 불감증의 나락에 빠질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사회적 삶의 도덕적 정당성이 무너진다면 그 궁극의 결말은 ‘리바이어던’의 제물이 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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