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재(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바야흐로 무엇을 지표로 삼아야 좋은지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하나의 공동체 안에서 그 공동체가 공유하는 규범에 따라 살던 시대는 지났다는 말이다. 태어나서 처음 접하게 되는 가족 공동체의 규범은 유치원, 학교, 사회로 그 지평이 넓어지면서 그 절대성을 잃기 마련이고, 지구화와 도시화의 경향은 이러한 갈등을 더욱 첨예화한다. 다른 지역, 다른 국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이제 대도시에 모여 살게 되었고 따라서 이들과의 교류와 소통에서 어떤 규범을 잣대로 삼아야할 지는 더욱 모호하게 되었다. 지구화와 도시화는 우리 사회의 환경을 시시각각 변화시키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규범이나 신념체계에 따른 생활방식은 미래를 보장할 수 없게 된다. 신제도주의경제학자 노스는 이를 ‘비에르고드적 세계에서의 불확실성’이라고 명한 바 있다. 

비에르고드적 세계에서 우리는 생존의 불확실성과 이에 따르는 불안에 끊임없이 시달리게 된다. 그렇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노스는 이에 사회적 차원의 제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안한다. 즉 이제 사회는 어떤 하나의 실체적 규범에 지배권을 부여하는 제도가 아니라 ‘다양한 선택가능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다양성’, 다양한 실험이 가능한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고 기능하기 위해서는 자아를 성숙시키는 과제가 수행돼야 한다. 다양한 선택과 실험이 보장되는 제도가 있다고 해도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성숙한 자아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이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다양한 규범들 속에서 균형을 잡는 가운데 자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아를 갖고 있지 못한 것 같다. 입시위주의 교육, 경쟁위주의 교육은 당대에 유력한 지식체계와 규범을 외우도록 촉구해왔고, 따라서 우리는 강력해 보이는 신념과 규범에 자신을 의지하는 법만을 배워왔을 뿐이다.  

성숙한 자아를 갖지 못하기에 우리는 불안하다. 불안하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의지할만한 강력한 어떤 것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프롬이 말했던 ‘자유로부터의 도피’이다. 마마보이는 강력한 어머니에게로 회귀한다. 광신도는 열광할 만한 절대자에게 자신을 내맡긴다. 생존의 불안에 떠는 자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온갖 자격증을 모아대는 자기계발의 프로젝트 속에서 자신을 잃어간다. 자유로부터의 도피가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강력한 어떤 것에 한 번 자신을 내어준 자아는 그 강력한 것을 보편적 진리로 만들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윤리적 정치적 파시즘의 예고이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선택과 실험이 가능한 제도를 만들기보다 과거의 규범으로 회귀하거나 하나의 규범을 지배적으로 만드는 일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개인은 성숙한 자아를 마련하기보다 불안함에 떨며 나약한 자아를 내맡길 강력한 인물을 부질없이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다면 파시즘의 악몽이 바로 우리의 삶에 깃들지 않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이현재(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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