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 공인자격은 어느 정도 된대?” 소개팅을 해주기로 한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듣는다면 어떨까. 면접 질문 같은 이 말에 마치 “컴퓨터활용능력 1급은 있대”라고 답해야만 할 것 같다. ‘공인자격’은 지난 2012년 3월 국립국어원 말다듬기위원회(이하 국어원)가 ‘스펙’에 대한 순화어로 제시한 말이다. 스펙이라는 말이 단순히 취업을 하는 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람의 어떤 능력 전반을 칭할 때도 쓰이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무리하게 순화한 결과다.

이 외에도 국어원이 단어가 쓰이는 다양한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번역만 해 순화어로 제시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에코백을 ‘친환경 가방’이라고 순화한다거나 포커페이스를 ‘무표정’으로 순화한 것이 그 예다. 에코백은 처음에는 비닐봉지 대신 재활용할 수 있고 분해속도가 빠른 친환경적인 가방을 칭하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장바구니 형태의 가벼운 가방 모두를 칭한다. 포커페이스 역시 단순히 무표정이 아닌 자신의 표정을 숨기려는 ‘의도’가 있을 때 쓰이는 말이다. ‘포커페이스’를 정확하게 전달하려면 ‘의중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이라고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단어가 특정한 상황에서만 쓰일 수 있도록 순화되면 기존에 언어 대중들이 활용하던 폭이 급격히 좁아지게 된다. 기존에 단어가 가지고 있던 함축적인 의미들을 다 풀어서 설명해야 하기 때문에 효율성 역시 떨어진다.

국어원의 순화어 중에는 영어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순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단어들도 더러 있다. 최근 국어원은 텀블러의 순화어로 ‘통컵’을 제시했다. 많은 누리꾼들이 ‘컵’은 영어가 아니냐며 문제를 제기했다. 쇼핑카트를 ‘쇼핑수레’로, 보드마카를 ‘칠판펜’으로 순화했을 때 역시 쇼핑과 펜은 순화의 대상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은 바 있지만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통컵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텀블러가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의견 역시 많았다. 대학에서 국어를 전공하고 있는 이한슬(22)씨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하자는 의의는 이해하지만 이미 우리에게 일상화 돼있는 텀블러라는 말을 억지로 바꾼 것은 좀 아쉽다”고 말했다.

한편 골드미스의 순화어였던 ‘황금독신여성’과 블랙푸드의 순화어였던 ‘검정먹거리’는 뜻은 잘 담고 있지만 단어의 길이가 너무 길고 단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그저 단순하게 나열해 와 닿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와 같은 문제는 순화어를 채택하는 과정이 누리꾼들의 투표로 결정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 과정에서 모두의 의견을 반영하면서 언어적 문제까지 철저히 고려하는 것에는 현실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 그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전문가들로 꾸려진 말다듬기위원회를 두고 있지만 여전히 순화어를 선정하는 것에 있어 대중들이 쉽게 인지할 수 있는 문제점조차 거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순화어가 이처럼 항상 현실과 동떨어져 무리하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리플을 순화한 ‘댓글’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아 지금은 모든 사이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됐다. 그 밖에도 네티즌을 의미하는 ‘누리꾼’과 올킬을 뜻하는 ‘싹쓸이’ 등이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리얼 버라이어티를 ‘생생예능’으로, 시스루를 ‘비침옷’ 등으로 순화하며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기존의 외래어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더 널리 쓰이는 순화어들은 다양한 맥락에 잘 부합하고 단어를 들었을 때 그 개념이 바로 떠오른다는 특징을 가진다.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하고 있는 정은수(22)씨는 “우리말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단어가 가진 원래의 의미가 퇴색돼서는 안 된다. 단순히 외래어가 우리말이 아니라는 생각에 억지로 순화하기보다 외래어들을 순화하려는 이유와 명분이 뚜렷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국어원은 그저 국어원이 있기 때문에 모든 말을 한국어로 바꾸려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국어원이 순화하고 있는 말들이 일상 대화에 자주 등장하는 점을 고려해 조금 더 심사숙고해 단어를 선정한다면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장한빛 기자 hanbitive@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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