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학교에서 맡는 두 번째 학기다. 초심자로 학생들과 잘 교감하는지 학기 내 고민하지만, 강의중간평가 이후엔 더 생각이 많다.

첫 학기 중간평가 이후였다. 80여명을 상대로 강의, 학생팀 발제와 토론, 소모임 활동 등을 뒤섞어 진행하고 있었다. 스스로 싫증이 날 무렵이었다. 학생들도 이 ‘새로운’ 방식에 빠르게 길들고 있었다. 토론이 강의에 갇히는 것이 안타까웠다. 모두에 강의가 있을 경우, 토론은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말미에 강의가 있을 경우, 토론의 열기는 “교수님이 정리해주실 거야”는 믿음에 식어가고 있었다. 2시간 50분 후면 답과 정리는 있기 마련이라는 버릇에 학생과 초심자 모두 갇혔다.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하던 중 교내 교수법 워크숍에 참석했다. “문제만 주고 답은 주지 마라”, “고기 아닌 고기 잡는 법을 배우게 하라”고 들었다. 다음 학기에는 발제와 토론을 위해 강의를 최소화해야겠다는 힌트를 얻었다. 가능하면 아예 강의를 없애리라 생각했다.

더불어, 또 다른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문제’는 주어지고 ‘답’을 찾는 자율과 고민만으로 충분한가? 학생 발제와 토론의 많은 부분은 실상 ‘문제’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에 쓰이지 않았나 반문하였다. 다음 학기에는 ‘문제’마저 학생들이 정의하게 해야겠다 생각했다.

두 번째 학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당장 수업계획서 모양이 이상해졌다. 첫 세 주 외 모든 주의 주제가 미정이었다. 학생들이 주제와 읽기자료를 정하게 했다. 무엇에 대해 ‘궁금해 할 것인지,’ ‘놀라워 할 것인지’ 문제를 정의하는 것이다. 쉽지 않았다. 궁금해 하거나 놀라워 하려면, 무엇보다 학생들 스스로 무언가를 ‘관찰’하고 ‘정리’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을 학생들과 초심자 모두 깨닫는 과정이었다. 좋은 정보원의 중요성도 깨닫는다.

문제와 읽기자료가 정해지면, 매주 수업은 학생들이 주관했다. 주제발표를 하고 토론시간을 갖는다. 초심자는 토론사회자일 뿐이다. 읽을거리에 대한 내용정리는 없다. 곧장 학생들의 소감과 비판을 요구했다. 참여할 때마다 참여점수가 매겨졌다. 초심자는 냉정한 서기인 셈이다. “소외되지 않으려면 읽을거리를 읽고 와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당연하다. “점수 때문에 질문을 위한 질문을 한다”, “질문 생각하느라 남 얘길 경청 못 한다”고 한다. 당연하다.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덧 경청과 질문을 함께 하는 이들을 보게 된다. 우리 모두 수업에서 소외되기 싫어한다는 것도 자명해졌다.

수업계획서 공란도 차츰 매워졌다. 경제적 하층은 왜 보수정당을 지지했나? 사회에 대한 기업기부는 어떻게 이해되고 있나? ‘수평적 리더십’은 누가 왜 제기하나? ‘새터민’은 스스로 뭐라 호명하나? 여성에 대한 직장 내 저평가는 어떤 맥락에서 이뤄지나? 잡고 싶은 ‘고기’들이다. 초심자가 ‘잡는 법’ 두어 가지 일러주면 나머지 공란도 매워지리라. “조금 더 많은 지식과 보살핌을 주시면” 좋겠단다. 때가 이른 만큼 초심자의 생각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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