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노력은 다릅니다. 제 노력은 새빠시 신상입니다” tvN 드라마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의 대사다. 드라마 <미생>에는 그 흔한 러브라인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저 주인공 장그래가 직장에서 눈물 나도록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미생>은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됨에도 불구하고 순간 최고 시청률 7%, 평균 시청률 5.9%라는 기염을 토했다. 지상파 드라마조차 시청률 10%대에 진입하는 것이 어려운 최근 현실을 생각했을 때 <미생>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질 듯 안 이어지는 러브라인은 드라마의 재미를 주는 주요 요인이다. 그래서 러브라인 없는 드라마 <미생>의 성공이 더 특별해 보인다. 커다란 러브라인 없이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는 <미생>뿐만이 아니다. 아직까지 회자되는 <하얀거탑> 역시 러브라인이 아닌 주인공 ‘장준혁’의 분투를 중심내용으로 다뤘다. 이 밖에도 <싸인>, <골든 타임> 등 러브라인이 중심이 되지 않았음에도 많은 사랑을 받은 드라마들이 있다. 이들 드라마가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기존의 드라마에선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성장’이 주는 감동

능력 있고 멋진 재벌 2세 남주인공과 가난하고 순진하지만 누구보다 예쁜 여주인공. 많은 드라마들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이런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예쁘고 멋진 주인공은 시청자를 TV앞에 잡아두는 큰 요인이다. 하지만 드라마 <미생>에는 이런 잘난 캐릭터가 없다. 능력 없는 계약직 인턴 주인공 장그래가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드라마 <미생>은 매 화마다 자체 최고시청률을 갱신할 만큼 큰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 돌풍의 중심에는 주인공 장그래의 성장이 담겨 있다. <미생>은 26살이 되도록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보기 드문 청년 장그래가 사회에 내던져진 이야기를 그린다. 회를 거듭할수록 복사하나 제대로 못하던 장그래가 어엿한 어른이 되가는 성장기는 많은 시청자들의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미생>의 시청자인 이수민(22) 씨는 “주인공 장그래 뿐만 아니라 장그래를 이끌어주는 오과장, 김대리, 동기사원 등의 성장 역시 무척 기대된다”고 말했다.

성장의 서사로 사랑을 받은 드라마는 <미생>뿐만이 아니다. 2007년 최고의 드라마라 꼽히는 MBC 드라마 <하얀거탑> 역시 주인공 장준혁의 인간적 성장을 다룬다. 지금까지 많은 드라마들은 환자를 돕고 봉사하는 의사의 단면적인 모습만을 그려왔다. 하지만 <하얀거탑>은 이를 답습하지 않는다. 주인공 장준혁은 권력을 탐하기도 하고 시한부 인생으로 번민하기도 한다. 완벽한 삶을 얻기 위해 의사가 된 장준혁은 죽음과 대면하며 환자를 위하는 진정한 의사로 성장한다. 이런 입체적인 모습과 성장이 시청자들에게 <하얀거탑>을 사랑받게 한 요인 중 하나이다.

대체로 다른 드라마들은 성장하는 주인공을 크게 부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두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의 성장이 크게 두드러진다. 평소 드라마를 즐겨본다는 노찬호(19)씨는 “<미생>에는 러브라인이 전혀 없지만 장그래가 성장하는 과정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큰 감동을 줬다”고 말했다.


생생한 ‘직업묘사’로 얻는 희열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 문제는 지나치게 러브라인에 편중된 전개를 보인다는 점이다. 오죽하면 누리꾼들 사이에서 ‘미국 드라마는 경찰이 범인을 잡고 의사가 치료를 하는데, 한국 드라마는 경찰이 연애를 하고 의사가 연애를 한다’는 한국 드라마에 대한 비판의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이런 불만은 곧 시청자들이 그만큼 전문적인 ‘직업 드라마’를 원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킨 드라마가 바로 SBS 드라마 <싸인>과 MBC 드라마 <골든 타임>이다. 두 드라마 모두 생소한 직업을 전면에 내세워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싸인>은 법의학자, <골든 타임>은 응급실 외상외과 의사를 주요 소재로 삼았다. 두 드라마는 직업 활동에 초점을 맞춰 극을 진행한다. 드라마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매화마다 숨 가쁘게 일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준다.

시청자들은 드라마들을 통해 법의학자, 외상외과 의사를 간접 체험할 수 있다. <싸인>의 시청자 강재서(21) 씨는 “<싸인>에서 시체를 부검하는 등의 모습을 보면 법의학자를 체험하는 기분이 든다. 기존의 드라마에선 경험하기 힘든 부분이다. 이런 점 때문에 드라마를 다 보고나서도 다시 한 번 시청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특정 직업을 생생히 그리는데 초점을 맞춘 드라마는 러브라인과 다른 재미를 준다. 난관에 부닥치고 고민도 하지만 결국 사건을 해결해내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희열을 제공한다.


‘해체’와 ‘대응’이 조화된 드라마

시청자들은 왜 이런 ‘독특’한 드라마를 사랑했을까? 이 드라마들이 가지고 있는 탄탄한 사회적 연결고리 때문이다. 오명환의 『텔레비전 드라마 예술론』에 따르면 좋은 드라마는 ‘해체’와 ‘대응’을 만족해야 한다. 드라마는 소재를 축소·과장하여 드라마적인 표현으로 재밌게 바꾸는 ‘해체’의 과정을 거친다. 또한 드라마의 소재는 현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일상과 ‘대응’돼야 한다.

지금까지의 많은 한국 드라마들은 해체에는 충실했지만 대응의 과정은 비교적 미흡했다. 가난한 여주인공이 재벌2세와 만나 운명적 사랑에 빠지는 흔한 드라마 속 장면은 현실과 대응된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수민 씨는 “드라마 <미생>은 러브라인이 주된 내용인 여타 국내 드라마들과는 회사원들의 성장을 생생히 표현한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미생>의 주요 소재인 회사원이라는 평범한 직업과 주연들의 성장은 드라마가 현실과 긴밀한 관계를 갖게 한다. 마찬가지로 <하얀거탑>에서는 주인공의 인간적 번민이, <싸인>과 <골든 타임>에서는 직업에 대한 현실적인 묘사가 현실과의 끈을 놓지 않게 한다.

매년 수십 편의 드라마가 쏟아지는 한국은 ‘드라마의 왕국’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많은 한국드라마들이 재미를 위해 해체의 과정에만 집중했다. 하지만 이제는 시청자들이 브라운관 속에만 존재하는 화려한 결말만을 원하지는 않는다.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잃지 않은 드라마가 대중에게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이유다.

김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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