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새하얀 설원 속에 한 남자가 있다. 모든 것을 잃은 듯 초점 없는 눈빛으로. 그는 아버지이자 살인자다. <방황하는 칼날>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영화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됐다. 세부 구성이나 관점은 다소 다르나 이 영화 역시 소설과 동일하게 ‘법이 갖는 한계’라는 주제만은 유지했다. 

<방황하는 칼날>은 기형적인 구성으로 제작된 추리 영화이자 스릴러 영화다. 이 영화는 살인범과 살인동기 등을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이야기를 진행한다. 살인자도 살인동기를 감춰두고 이를 밝혀내는 일반적인 추리 영화의 구성과는 다르다. 일반적인 추리 장르의 형식을 벗어난 이 구성은 재미를 반감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와 달리, 오히려 영화가 전달하려는 주제를 더 잘 부각시킨다. 영화를 보노라면 우리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영화는 상현의 가족을 먼저 보여준다. 매일 매일을 바쁘게 살아가는 상현은 딸을 너무나도 사랑하지만 대부분의 아버지가 그렇듯 이를 표현하는 데 서툴다. 그런 상현의 딸이 살해당했다. 성폭행당한 채로. 영화는 그렇게 상현의 시각에서 상황을 바라본다.  상현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딸을 죽인 아이들은 ‘죽어 마땅’하다. 실제 <방황하는 칼날> 측은 페이스북을 통해 딸을 죽인 18세 소년들을 살해한 아버지의 살인이 정당한가에 대한 투표를 진행한 바 있다. 20만 명이 넘는 페이스북 유저가 참여한 이 투표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상현을 옹호한다. ‘그래도 살인은 잘못된 행동이다’에 투표한 사람은 8.5%에 그쳤다.

“내 딸을 죽인 소년 나까지 용서해야 합니까?”

▲ 딸의 죽음에 망연자실한 상현
영화는 똑같은 사건에 대해 다른 시각도 제공한다. 바로 형사인 억관의 시선이다. 억관은 딸을 죽인 아이가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낮은 형량을 받는 현실의 이와같은 부조리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형사라는 직업으로 인해 살인자인 상현을 뒤쫓을 수밖에 없다. 똑같은 현상에 대해 상현과 억관의 시선, 즉 감정과 이성의 시선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도록 영화는 의도하고 있다. 따라서 <방황하는 칼날>은 어느 쪽이 옳다는 식의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법이 지닌 한계에 대해 균형잡힌 시각으로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대중에게 오락과 감동을 선사한다. 그와 동시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방황하는 칼날>은 영화 그 자체로도 상당히 잘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치를 가지는 이유는 많은 세대가 걸쳐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모순점을 잘 표현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영화의 제목이 갖는 의미는 명확하다. 법은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정의의 여신이 한 손에 들고 있는 칼은 정의를 상징한다. 영화가 말한다. “정의의 칼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어 영화는 묻는다. “당신의 칼날은 어디로 향해있습니까?” 평상시 우리나라의 법이 갖는 모순적인 모습이나 불합리한 행태에 의문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의 시각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 함께 보면 좋은 영화
  -  <도가니> (황동혁 감독, 2011)
  -  <돈크라이마미> (김용한 감독, 2012)
  -  <한공주> (이수진 감독, 2014)


김승환 기자 ktaean5445@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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