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을 맞아 할아버지 댁에서 친인척들과 전을 먹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앨범을 들고 오신다. 오래된 흑백 졸업사진이지만 대번에 아버지를 찾아낸다. 나의 어렸을 적 모습과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할머니는 사촌동생을 보며 얄궂은 농담을 던지신다. “너 어렸을 때는 사람들이 다리에서 주워왔다고 놀렸다. 엄마도 안 닮고, 아빠도 안 닮아서.” 그러고 보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두 분 모두 심한 곱슬머리에 무꺼풀인 것과 비교하면 사촌동생은 윤기가 흐르는 직모에 짙은 쌍꺼풀이 있다. 도대체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해답은 유전자에 있다.


유전자, 혼자 발현되거나 함께 발현되거나

유전자는 생물체의 특정 형질을 만들어내는 유전 정보의 단위다. 부모세대의 형질을 자식세대로 전달하는 유전자의 실체를 본격적으로 밝힌 것은 멘델이다. 멘델은 완두콩을 이용해 멘델의 법칙을 밝혀냈다. 멘델은 키가 큰 완두콩과 키가 작은 완두콩을 교배시켰는데 그 결과 키가 큰 완두콩만이 나타났다. 큰 키라는 유전형질이 작은 키라는 유전형질보다 우선해 나타난 것이다. 멘델의 법칙 중 하나인 우열의 법칙이 바로 이것이다. 우열의 법칙에서 대립하는 두 유전자 중 우선해서 발현하는 유전자를 우성유전자, 형질로 발현되지 않고 억제되는 유전자를 열성유전자라고 한다. 사촌동생이 가지고 있는 직모와 쌍꺼풀은 각각 큰아버지와 큰어머니의 곱슬머리와 무꺼풀과 비교했을 때 우성형질이다. 하지만 우성유전자와 열성유전자는 발현유무에 따른 차이일 뿐 형질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지표가 아니다. 치매를 일으키는 알츠하이머의 경우 우성인자가 유발하는 유전질환이다. 따라서 우성유전자가 열성유전자보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가 모두 우열의 법칙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우열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 중 하나가 피부색이다. 백인과 흑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대다수는 희거나 검은 피부가 아닌 갈색의 피부를 갖는다. 한 특성만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부와 모의 특성을 모두 물려받아 중간 형태의 특성을 띄는 것이다. 우리대학 생명과학과 이동희 교수는 “피부색은 적어도 100여개의 유전자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몸무게, 키, 지능 등이 복수의 유전자에 의해 표현형태가 결정되는 것처럼 피부색 역시 멜라닌 색소의 발현에 공헌하는 다수의 유전자 조합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백인과 흑인 부모에서 태어난 혼혈아의 대부분이 갈색 피부를 띄는 이유는 멜라닌 색소의 형성에 관여하는 다수의 대립유전자 쌍 사이에 우열이 없는 소위 불완전우성의 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고 설명했다. 이처럼 인간의 유전자에는 독립되어 발현되는 개체뿐만 아니라 서로 복잡한 방법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전자들도 있다.


게놈프로젝트, 유전자를 파헤치려는 시도

학자들은 위와 같은 다양한 유전자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속에 있는 모든 유전자 개개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속에 있는 모든 유전자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인류는 이미 특정 유전자가 우리 몸 안에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지 알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이를 위한 시도 중 하나가 게놈프로젝트(genome project)다.

유전자의 비밀을 밝혀주는 게놈지도가 완성되면 여러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게놈(genome)은 유전자(gene)와 염색체(chromosome)의 합성어로 한 생물체가 지닌 모든 유전정보의 집합체를 뜻한다. 유전자는 염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염기의 배열순서를 염기서열이라고 한다. 염기서열이 바뀌면 생명체의 특정 형질을 결정하는 유전자의 성격 역시 바뀐다. 즉 인간게놈지도는 인간이 가진 약 31억쌍의 염기를 일렬로 늘어놓은 유전자지도라고 할 수 있다. 결국 게놈지도를 이용해 불치병을 고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염기서열과 환자의 염기서열을 비교해 나열된 염기순서의 차이를 발견함으로써 병을 고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지난 2003년 4월 HGP(human genome project) 국제 컨소시엄은 프로젝트의 완성을 선언하며 게놈지도를 발표했다. 그렇다면 인류발생 이래 최대의 숙원사업 중 하나인 무병장수의 시대가 도래했을까? 불행하게도 그런 시대가 오지는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이 교수는 “인간게놈지도의 완성은 획기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런 고귀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도구가 완벽하게 개발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하나의 유전자가 하나의 형질을 발현한다는 가설은 부정되고 하나의 형질에 무수한 유전자가 관여한다는 사실과 하나의 유전자가 다양한 형질에 관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더 큰 혼란이 초래되고 있는 상태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게놈프로젝트의 초기 단계에서는 유전자와 그 형질의 발현은 매우 단순하여 한가지 또는 소수의 유전자가 형질을 결정하는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후에 훨씬 많은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밝혀졌다. 마치 3차 방정식까지는 어느 정도 풀 수 있으나 10차 방정식은 거의 풀 수가 없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피부색을 결정하는 유전자 간의 원리를 밝혀낸 것과 비교한다면 게놈프로젝트의 비밀을 푸는 것은 훨씬 더 높은 차원의 방정식 문제를 풀어내야 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셈이다.


후성유전학, 환경으로 눈을 돌리다

형질이 달라지는 이유를 개체 간 염기서열의 차이에 의해서만 찾았던 기존 유전학의 관점을 보완하며 최근 주목받고 있는 것이 후성유전학이다. 후성유전학은 염기서열이 같은 생물 사이에도 발현되는 형질 간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 차이는 유전자를 조절하는 부착물들에 의해 발생한다. 이 교수는 “같은 형질을 가진 유전자라 하더라도 유전자를 구성하고 있는 염기에 화학적 변형이 가해지거나, 염색체의 구조적 차이에 의해 유전적 발현의 차이를 초래하는 경우 각각의 형질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후성유전학은 동물에 관한 실험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점차 그 연구 대상이 사람으로 확대되고 있다. 2차 대전 기간에 집단학살의 영향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이하 PTSD)를 겪었던 여성들의 자식이 그렇지 않은 여성의 자식보다 PTSD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심지어 이들은 PTSD 뿐만 아니라 고양된 스트레스 반응을 보여 여러 정신질환에 더 취약했다. 즉 유전자를 둘러싼 환경이 다음 세대의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 이는 부모세대가 겪은 환경이 자식에게 유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환경에는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기근과 같은 환경 역시 포함된다.

이 교수는 “유전학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유전학자와 컴퓨터과학자와의 실질적 교류가 있어야 한다. 단편적인 유전학 연구를 통섭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알고리즘과 복잡한 계산을 위한 컴퓨터 이론의 도입이 필요한 것이다. 최근에 이러한 조짐이 엿보이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라고 말했다.

 

글_ 조준형 기자 no1control@uos.ac.kr
감수_ 생명과학과 이동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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