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부정적인 어법이 전적으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자아를 둘러싼 환경, 곧 타자들의 세계가 불합리하고 부조리할 경우, 이를 비판하고 지적하여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어법은 비판적 사고력을 내재한 것이 된다. 가령, ‘일을 그렇게 하면 안 돼. 그것은 남을 속이는 일이야. 이렇게 해야 양심적이지!’라는 어법이 아마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하지만 실제 삶속에서는 이러한 어법은 미미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예의 비판적 사고력을 상실한 부정적인 어법이 극단에 이르면, 그것은 독단적 어법으로써 우리 사회를 대립과 반목으로 이끌어간다. 한 마디로 소통불능과 폭력의 사회를 만든다. 이러한 사실을 이성복 시인의 80~90년대의 시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말이 통하지 않는 곳”은 말 대신에 폭력으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 폭력은 “사람이 사람을 괴롭히고, 그러나 죽지 않을 만큼 짓이기”는 모습으로, “지치면 가족이나 옆사람을 괴롭혔다 쉽게 노여움이 들었고 발 한번 밟아도 불구대천 원수가 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어법은 긍정적인 어법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다. 상생의 사회를 위해서다. 부정적인 어법은 동일성을 강요한다. 즉 타자가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와 타자는 어떠한 이유로도 동일해질 수가 없다. 근원적으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동일성은 차이를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폭력적인 사유 형태가 된다. 따라서 동일성을 폐기하고 타자성을 복원해야 한다. 예의 타자성은 나와 타자의 다른 점(차이)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 차이를 받아들일 때 바로 긍정적인 어법, 칭찬과 격려의 어법이 산출된다.
긍정적인 어법은 타자 중심이다. 진위여부를 따지기 전에 먼저 타자를 배려하고 인정해준다. 가령, 팀 프로젝트를 할 때 좀 못하는 친구가 있어도, ‘저 친구는 왜 저렇게 못해. 도움이 안 되네.’라는 어법보다, ‘저 친구는 결과를 떠나 뭐든 열정적이야. 이번에도 아이디어는 매우 참신했어.’라는 어법이 바로 그것이다. 긍정의 기본 전제는 사랑이다. 이성복 시인이 “삶은 치유받을 대상이 아니었다 치유받아야 할 것은 나였다”라고 반성하고 있듯이, 먼저 ‘나’부터 사랑 없음을 반성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이 생긴다. 사랑 없는 부정적인 어법은 문제를 남기지만 사랑 있는 긍정적인 어법은 문제를 해결하고 기쁨도 준다.
정유화(창의공공교양교육부 글쓰기센터 강의전담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