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시청역 3번 출구를 나와 광화문 방향으로 조금 걸어가면 하나의 낡은 건물과 만나게 된다. 보통 필자가 학생들과 덕수궁 일대 답사를 할 때 마지막으로 들르는 곳으로 현재 서울특별시의회 청사이다. 건축의 문외한인 필자의 눈에 이 건물은 조금 높은 탑이 부속되어 있는 점 외에 그렇게 두드러진 건축적 의의가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물론 1936년 건립된 이 건물은 일반인이 보기에 가시적 아름다움이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건물이 건립되었을 당시의 세계적인 건축 사조가 반영되어 있는 등 나름의 건축적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 건물은 현재 등록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혹은 그보다 더 중요한 점은 일제 강점기 경성부민관(오늘날의 시민회관)으로 건립되어 광복후 서울시민회관으로, 다시 1950년대 이래 국회의사당으로, 현재 서울특별시의회 청사에 이르는 긴 시간 동안 이 건물에 쌓인 ‘역사’가 아닌가 한다. 우리는 이 역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현재 건물 입구 옆 회단에는 조그만 표석이 하나 서 있다. “부민관폭파의거터. 1945년 7월 24일 애국 청년 조문기, 류만수, 강윤국이 친일파 박춘금 일당의 친일연설 도중 연단을 폭파했던 자리.” 이 표석은 일제의 전쟁 동원의 광기가 극에 달했던, 8.15 광복을 한 달도 남겨두지 않았던 어느 날 이 건물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표석에서 어떤 현장감이나 사건의 의미를 생생하게 느끼기는 쉽지 않다.

의거의 당사자 중 한 분인 조문기 선생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모했지. 아마 나이가 어려서 철이 없어서 그랬을 거야. 폭탄을 안고 현장에 가서 1시간 가량 헤매고 다녔으니까. …… 길 건너갔죠. 길을 건너면 조금 아래쪽이 시청이예요. 셋이 거기에 앉아 시계를 보고 있는 거예요. 정확하게 3분 있다가 터지게 되어 있으니까. 기술자도 아닌데 신통하게도 계획한 대로 정확하게 연달아 탕탕 터지더라고. 그러니까 완전히 성공을 한 거지. 한밤중에 태평로에서 쾅쾅 터지니까 소리가 요란하잖아요? 그 폭음이 금방 무너지는 것 같더라고.”

상상해 보자. 폭탄을 품 안에 숨긴 채 한 시간씩 행사장을 헤매 다니고, 겨우 설치를 끝내고 경성부청(서울시 구청사) 앞으로 건너가 나란히 앉아서 시계를 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의거 당시 열여덟, 열아홉 소년에 불과했던 그들의 떨리는 마음을. 그리고 질문해 보자. 무엇이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독립국 조선을 알지 못했던 이들을 이런 위험한 거사로 이끌었는지. 메마르게 사실만 전달하는 표석에서 과연 우리는 이런 상상과 질문을 떠올릴 수 있을까?

낡은 건축물이 소중한 것은 오래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소중한 까닭은 오랜 세월 그 장소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역사’로 쌓여 있기 때문이다. 그 ‘역사’를 발굴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기억 속에 살려내는 일은 일차적으로 역사 연구자인 필자의 몫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 모두의 몫이기도 하다. 장소에서 그 장소의 현재뿐 아니라 역사를 실감해 보는 것 말이다.


염복규(국사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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