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첫 구절이다. 눈을 뜨니 벌레가 돼 있었다는 소설 속 낯선 이야기. 하지만 최근 사회에 대입해보면 전혀 낯설지 않다. 눈을 뜨면 한 가지 이상의 ‘충’이 되어버리는 요즘, 우리는 왜 모두 벌레로 변신한 것일까?

 

혐오의 가장 쉬운 방법, ‘충’

최근 ‘맘충’이라는 단어가 논란됐다. 자녀사랑을 핑계로 몰지각한 행동을 하며, 개념 없는 아이들을 방관하고 두둔하는 일부 부모를 일컫는 말이다. 강연주(23) 씨는 “그동안 충이라는 단어를 장난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엄마라는 단어에 ‘충’이 붙는 순간 이건 아닌 것 같았다”며 “자신을 낳고 키워준 주체에게 벌레라는 표현을 붙인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고 말했다. 이렇듯 충을 사용하는 것은 현재 어떤 집단을 혐오하는 데 있어 가장 쉬운 방법 중 하나가 됐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충’은 굉장히 자극적이면서 편리성도 갖추고 있다. 충이라는 딱지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인터넷 공간에서 상대방을 평가절하하기 가장 쉬운 단어”라고 말했다.

우리대학 도시사회학과 임동균 교수는 “특정 집단에 충을 붙여 공격을 하는 것인데, 그럴 경우 충이 붙은 집단은 구조적으로 소수자의 위치에 있게 된다. 충이 붙는 대상들은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차별을 겪게 되며, 낙인이 찍혀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며 충에 의해 사람들이 겪게 될 피해에 대해 얘기했다.


열심히 사는 일벌레들의 한탄

출근을 하면 출근충이 되고, 고시시험을 준비하면 고시충이 된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노력충이 돼버렸다.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어느새 그들의 뒤에도 충이 붙기 시작했다. 그들은 왜 벌레가 됐을까. 안지윤(25) 씨는 “함께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끼리 ‘출근충’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한숨이 나오는 동시에 동질감도 느껴지는 표현이다”고 말했다.

임동균 교수는 사람들이 ‘충’을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 “이들은 자신과 유사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모두 ‘충’이라 부르며 동질감을 느끼려 한다. 또한 자신의 부정적인 상황을 희화화시켜 웃음으로 해소하려 한다”며 “결국 현재의 어려운 상황이 전부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를 ‘충’이라 말한다”고 말했다. 김헌식 문화평론가는 “사회에 대한 소극적 저항의 의미로 볼 수 있다. 회사나 학교 같은 체제에 묶여 사는 자신들을 자조함으로써 현 세대에 저항하는 것이다”라며 그 이유를 분석했다.


모두가 벌레가 된 세상, 그 후

혐오의 의미로 쓰이든 자조의 의미로 쓰이든, 어떤 의미로 충이 쓰여도 우려가 된다는 것이 전문가의 입장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혐오, 자조와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이 ‘충’이라는 단어와 함께 무분별하게 쓰이면서 우리는 점점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부정적인 단어들이 계속 가볍게 쓰이면 사회는 결국 병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좀 더 지켜보자는 견해도 있다. 임동균 교수는 “언어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언어에는 반드시 자정작용이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충’이라는 단어로 인해 피해를 입고 그 심각성을 알게 되면 스스로 자제하고 자정하고자 하는 노력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다. 너무 심각하게 바라보지 않고 하나의 학습 과정으로 인식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수환 선임기자 iialal91@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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