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하늘, 유유자적한 구름. 발을 내딛을 때마다 사각사각 소리를 내는 단풍잎과 은행잎, 누군가가 옆에 있으면 따뜻해지는 계절, 풋풋한 봄과는 다른 성숙한 사랑의 계절. 그것이 모두 ‘가을’일 것이다. <슬로우 비디오>는 이러한 가을의 감성에 어울리는 영화이다.

<슬로우 비디오>의 주인공 ‘여장부’는 병에 가까운 동체시력을 가진 인물이다. 말하자면 일상이 ‘슬로우 비디오’인 것이다. 운동 경기에서는 이롭고 유용한 능력이지만 여장부의 동체시력은 매 순간이 느리게만 보이는 조절할 수 없는 ‘병’과 같다. 주인공은 시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눈의 무리를 막기 위해 선글라스에 의존해야 한다. 그의 병적인 동체시력은 방향감각을 교란해 뛰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남들과 다른 시력 탓에 따돌림을 당하게 되고 약 10년을 방 한 칸에 의지한 채 은둔형 외톨이로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도저히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에 cctv 관제소에 취직한다. 그는 cctv를 보며 마을을 그려본다. 그러던 어느날 cctv에서 스쳐가는 일상들 속에서 10년 전에 헤어진 첫사랑 ‘봉수미’를 발견하고 그는 바로 그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의 ‘느린’ 로맨스가 시작된다.

▲ 여장부와 봉수미가 은행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다.

나이를 신경 쓰고 생계를 걱정하는 그녀는 현실적이다. 여장부가 내뱉는 오글거리는 대사에 욕지거리를 날리기도 한다. 하지만 뮤지컬 배우라는 꿈을 위해 가난의 괴로움을 감수하는 정열적이고 순수한 인물이다. 주인공 여장부 역시 10년의 은둔생활 속에서도 마음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다. 봉수미는 순수하고 엉뚱한 여장부의 모습에 사랑을 느낀다.

주인공은 cctv를 통해 그녀와 동행한다. 그녀의 동선을 그리고 발자국을 센다. 그녀가 춤추는 모습, 손을 흔드는 모습을 보며 웃음을 짓는다. 여장부는 그녀가 매일 밤 바라보던 커피숍 앞에 소파를 두기도 하고, 그녀를 바다로 데려갈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그의 눈에는 그녀의 행동이 한 장의 사진처럼 보이고 그 순간순간은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각인된다. 그의 순수한 사랑과 희귀한 능력은 영화를 하나의 동화처럼 만들어 가는 힘이 된다. 

가을의 서정적 분위기는 이들의 순수한 로맨스와 더해져 영화의 장면들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한다. 낙엽이 저변에 깔린 공원과 얇은 코트와 스웨터, 목도리… 붉고, 노란 색감은 영화를 따뜻하게 만든다. 영화의 결말은 동화적인 피아노 반주와 가을에 어울리는 노리플라이의 ‘조금씩, 천천히, 너에게’로 장식된다.      
  
바람이 속삭이는 공원에서 눈을 감고 걷다보면, 사랑하는 이의 발걸음이 내는 낙엽소리가 따라온다. 갈색의 긴 곱슬머리를 한 봉수미의 총총걸음은 우리로 하여금 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온화하고 성근 하루하루 속에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말라버린 우리의 마음을 적셔줄 한 방울의 눈물로 다가올 것이다. 

 


국승인 기자 qkznlqjffp44@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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