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보는 길. 쌩하니 스쳐가는 자동차들 옆으로 걷고 또 걸어도 횡단보도는 보이지 않고….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헤매는 기분으로 횡단보도를 찾아다녔던 경험,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겁니다. 이럴 때면 보행자의 편의를 고려하지 않는 도로설계 때문에 짜증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이런 길은 도대체 누가 만든 거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 정부는 전국적인 재건사업을 위해 도시공학자 콜린 부케넌에게 도로설계에 관한 연구를 의뢰합니다. 부케넌이 이끄는 연구팀은 1963년 보고서를 하나 내놓는데, 바로 이 보고서가 세계 여러 도시에서 교통계획의 근간이 된 「Traffic in towns」입니다.

이 보고서의 핵심은 보행자와 자동차를 분리하는 것에 있습니다. 당시 영국 정부는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자동차가 사람들과 섞이면서 교통이 혼잡해지고, 안전사고가 발생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연구팀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도시를 여러 구역으로 분할하는 ‘주거환경지구’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큰 도로에서 작은 도로까지 위계를 설정하여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큰 도로는 사람들이 많은 주거환경지구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배치했습니다. 주거환경지구에 가까워질수록 작은 도로를 배치하는 방법으로 보행자와 자동차를 분리시킨 것입니다.

교통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보행자와 차를 분리해야 한다는 이론은 이후 교통계획에서 정설로 자리 잡았습니다. 보행자를 도로에서 가급적 멀리 떨어뜨림으로써 자동차가 방해받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도로를 만드는 것이 교통계획 과정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됐습니다. 보행자와 자동차를 더욱 확실하게 분리하기 위해 육교나 지하보도, 고가도로의 건설이 적극 추진됐고 자동차의 주행을 방해하는 횡단보도나 기타 장애물은 가급적 줄였습니다.

「Traffic in towns」에 담긴 내용을 기초로 하여 도시를 단순한 사각형으로 나누는 ‘블록’ 시스템이 미국 등지에 적용되었고 우리나라의 내부순환로, 간선도로 등도 이를 기초로 설계되었습니다. 부케넌이 정립한 주거환경지구 개념은 현재까지도 교통설계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 자동차를 보행자와 분리하기 위해 건설된 고가도로

그 많던 육교는 어디로 갔을까?

2000년대에 들어서자 부케넌식 교통설계에 대한 회의론이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수십 년간의 시행착오를 통해 보행자와 자동차가 분리된 환경이 오히려 안전사고에 취약하다는 것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보행자와 자동차가 분리된 환경에서 운전자는 보행자를 신경 쓰지 않고 빠른 속도로 주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경우 도로에 보행자가 들어오게 되면 매우 위험합니다. 반면 보행자와 자동차가 도로를 공유하는 경우 운전자는 보행자를 고려해 속도를 줄이게 되므로 더 안전한 도로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오직 자동차만을 위해 설계된 공간을 사람에게 다시 돌려주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유럽에서는 보행자, 자전거, 자동차가 함께 다닐 수 있는 도로를 구상하기 시작했고 미국에서 이러한 형태의 도로를 ‘완전 도로’라는 용어로 개념화합니다. 변화를 맞이한 시류 속에서 일자로 곧게 뻗어 차가 달리기 좋게 뻥 뚫린 도로는 더 이상 좋은 도로라 평가받지 못합니다. 최근 이루어지는 도로 설계에서는 차도와 인도의 높낮이 차이를 없애고 둘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해서 사람과 자동차가 자연스레 섞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구불구불해서 달리기 어렵고 사람, 강아지, 자전거와 뒤섞여 신경 쓸 것이 많은 도로가 좋은 도로가 된 셈입니다.

우리나라도 이와 같은 흐름을 받아들여 보행자가 도로 위로 나올 수 있게 여러 가지 교통정책을 펼치는 중입니다. 다량의 육교를 철거하고 횡단보도를 늘리는 한편 고가도로를 없애고 완전 도로를 늘리고 있습니다. 2014년 청주시에서는 국내 최초로 완전도로를 건설하여 세간의 관심을 모았습니다. 아직 걸음마 단계에 불과하지만 이렇듯 우리나라도 인간 중심 교통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전재영 수습기자 jujaya92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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