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이 뜨거운 감자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액면 단위의 절하 및 호칭 단위의 변경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천원을 1원으로, 만원을 10원으로 낮추는 것처럼 화폐의 단위를 낮추는 것이다. 지난 17일 한국은행 이주열 총재가 “리디노미네이션에 공감한다”라고 입장을 밝힌데 이어, 최경환 부총리는 “리디노미네이션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고 입장을 표명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리디노미네이션이 포털 검색어 1순위로 올라가기도 했다.


우리나라도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한 때?

카페에 가면 ‘아메리카노 3.0’, ‘자몽에이드 4.5’와 같이 가격을 한 자리 수로 적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0을 빼도 불편함이 발생하기는커녕 오히려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우리나라 화폐단위가 크기 때문에 카페에서 자체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을 한 셈이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화폐 단위가 가장 높은 국가다. 1달러에 1000원, 1파운드에 1800원같이 달러대비 화폐 단위가 네 자리 수 이상 차이가 나는 나라는 OECD 국가 중 한국뿐이다.

그렇다면 리디노미네이션은 언제 필요한 것일까? 짐바브웨의 경우를 살펴보자. 짐바브웨의 경우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빵 한 개가 100조 짐바브웨 달러가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짐바브웨 국민은 빵을 사기 위해 화폐를 수북하게 올린 수레를 끌고 간다. 이렇게 화폐 단위가 높아 사용상의 비효율성이 발생할 때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1953년과 1962년에 리디노미네이션을 시행한 바 있다. 두 번 모두 화폐 단위 인하와 호칭 변경이 함께 이루어졌는데, 1953년에는 100원을 1환으로 절하했고 1962년에는 10환을 1원으로 절하했다. 한국 전쟁 이후의 불안정한 경제 상황 속에서 통화량이 급증했고 그에 따라 물가도 크게 상승했기 때문이다.

과거 두 번의 리디노미네이션은 내부적으로는 식민 통치, 전쟁을 겪고 혼란한 국내 경제 상황에서 누적된 물가상승을 현실화하고 거래비용을 절감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외부적으로는 우리나라의 가격체계가 국제적 가격체계를 따라갈 수 있게 됐고 이에 따라 세계화의 흐름에 맞춰갈 수 있도록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과거의 리디노미네이션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도 밥 한 공기에 몇 십만원, 몇 백만원을 지불하면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엄연히 다른 리디노미네이션과 화폐 개혁

최근에 ‘리디노미네이션(화폐개혁)’이라는 표기를 뉴스나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쉽게 접하게 된다. 그러나 리디노미네이션과 화폐개혁은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의 효과라고 알려져 있는 ‘물가안정 기대’, ‘경기부양’ 등은 화폐개혁에 따른 긍정적 효과에 대한 설명이다. 많은 사람들이 리디노미네이션과 화폐개혁을 혼동하고 있다. 경희대 경제학과 안재욱 교수는 “사실 리디노미네이션 자체는 큰 이익도 큰 문제도 없다. 사람들이 흔히 걱정하는 문제점인 초인플레이션, 화폐 가치 소멸은 리디노미네이션과 함께 시행하는 화폐개혁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단순히 천원을 1원으로 만드는 액면 단위 절하만을 의미한다.

반면 화폐개혁은 시중의 통화량이 많아지면 물가가 상승한다는 점을 이용한 통화 정책이다. 물가 상승이 심각한 국가들은 리디노미네이션과 함께 화폐개혁을 시행해 물가 안정을 꾀한다. 물가안정을 위한 화폐개혁의 대표적인 예가 ‘예금동결’이다. 예금동결이란 정부가 리디노미네이션을 통해 새로운 화폐(이하 신화폐)를 발행하고 구화폐를 신화폐로 바꾸는 과정에서 화폐의 일부를 교환해 주지 않는 것이다. 이를 통해 통화량은 줄어들게 되고 자연스럽게 물가는 안정된다. 하지만 예금동결에는 맹점이 존재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적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화폐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 사람들은 실물자산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부동산 투기, 금 매입 등 실물 자산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발생한다. 실물자산은 화폐변동에도 그 가치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짐바브웨, 북한 등 화폐개혁에 실패한 나라들을 보면 실물 투기가 일어나 화폐의 가치는 더욱 떨어지고 화폐가 기능을 상실하는 일이 일어났다.


▲ 초인플레이션을 겪고 화폐가 쓸모없어진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의 모습이다. 1) 화폐를 벽지로 쓰는 사람 2)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화폐를 쓸어 담는 사람 3) 양배추 하나를 사기 위해 화폐 한 다발을 내는 모습
리디노미네이션 괜찮아, 화폐개혁은 글쎄

그렇다면 현재 우리나라에는 화폐개혁이 필요할까? 결과적으로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이 많지만 리디노미네이션과 함께 시행되는 화폐개혁에는 부정적인 입장이 많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찬성하는 가장 큰 이유는 리디노미네이션 자체에는 큰 영향력이 없기 때문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은 단순히 액면 단위를 절하하는 것일 뿐 경제 흐름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인식적 측면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은 원화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화폐 단위가 높다는 것은 원화가 평가 절하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나타낸다. 1달러와 1원이 같다면 우리나라가 미국과 경제 규모를 나란히 한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 달러 대비 환율에서 0의 숫자가 많을수록 경제 규모가 떨어지는 후진국의 인상을 준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 단위를 낮춤으로써 원화의 위상과 가치가 높아지게 할 수 있다.

또한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 사용상의 불편함을 해소시킬 수 있다. 백만원권 수표를 받았을 때, 한눈에 규모를 인지하지 못하고 0을 세어야하는 수고가 발생한다. 화폐 개혁이 이뤄진다면 0의 수는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또한 화폐를 소지하는데도 편할 것이다.

물론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단점도 있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위해선 구화폐를 모두 회수하여 신화폐로 바꿔야한다. 이에 따른 신화폐 발행 비용, 화폐 교환 및 회수 상의 인력 소모 그리고 국민들의 수고는 당연히 커다란 사회적 비용에 해당한다. 또한 새로운 화폐 단위에 맞춰 모든 시스템을 개편하면서 또다시 비용이 발생한다.

안재욱 교수는 “화폐 단위가 높은 우리나라 특성상 리디노미네이션은 생각해볼만한 정책”이라며 “신화폐를 만드는 비용도 시행 초반에만 클 뿐 장기적으로 보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라고 긍정적인 입장을 표했다.

반면 화폐개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 지배적이다. 한국은행 이주열 총재는 “리디노미네이션의 필요성에 공감했을 뿐 화폐개혁은 낭설”이라고 밝혔으며 “화폐개혁의 파생효과인 물가 안정, 지하경제 양성화는 사실상 기대하기 어렵다”고 해명했다. 다른 나라에서 나타나고 있는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화폐 기능 소멸 등의 문제들도 화폐개혁 때문에 발생한 문제이다. 안 교수는 “후진국들이 화폐개혁과 리디노미네이션을 함께 시행했는데 이는 대부분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오히려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는 원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지금 당장은 리디노미네이션이 시행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안 교수는 “리디노미네이션과 화폐개혁은 경제가 안정적인 기조를 유지하고 있을 때 시행하는 것이 이상적”이라며 “지금은 경제 불황기이기 때문에 무리한 정책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리디노미네이션을 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화폐 단위는 필연적으로 물가 상승과 함께 점점 높아지기 때문이다. 리디노미네이션이 시행된다면 그에 앞서 많은 준비가 요구된다. 결과에 상관없이 파장이 큰 정책이므로 시행 이전에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할 것이고 시행 이후에는 안정화 정책에 힘써야 할 것이다.


국승인 기자 qkznlqjffp44@uos.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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