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로서 가끔 대학교육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때론 ‘대학교육의 목표는 무엇일까’하는 거창한 생각을 할 때도 있고 또 때론 ‘이번 학기 이 과목에서 무엇을 강의할까?’하는 작은 생각을 할 때도 있다.

학생들도 무엇을 공부할지, 어떻게 공부하여야 할지, 왜? 혹은 무슨 목적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할 것이다.  대학 외부에서도 대학교육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한다. 대학 졸업생이 문서를 작성할 줄 모른다거나 한자를 모른다는 주장도 있고, 최근에는 코딩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등 수많은 주장이 있다. 이에 따라 여론도 형성이 되고 대학도 그에 따라 교육 방향을 자주 수정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대학도 여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최근 역량을 강조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기도 했다. 필자도 이런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고 학과의 교과과정과 교육내용을 수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최근의 움직임은 취업에 대한 압박과 어울려 지나치게 기능적 측면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대학교육이 단순히 직업을 위한 교육이 되어서는 곤란하고, 대학교육에는 기능교육에 앞서 이상이 담겨있어야 한다.

대학초년생일 때 필자의 학습 목표는 “흥미로운 것을 탐구”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여름방학동안 내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질문은 유명한 양동이 문제였다. 양동이에 물을 담고 양동이를 돌리면 원심력에 의해 중심부는 내려가고 주변은 상승한다. 이 때 질문은 “양동이를 놔두고 우주 전체가 돌아간다면 물표면은 어떻게 될까?”이다. 이런 ‘흥미로운’ 질문은 교과목마다 나타났고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모색하면서 대학을 마쳤고 결국 물리학자로서의 길을 택한 것이다. 이 학습방향이 옳다면 교육은 ‘흥미로운 문제’를 소개하고 그 문제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제공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대학원에서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하였다. 상대론적 양자역학을 공부하는데 교과서 반 페이지에 적혀 있는 수식을 유도하기 위해 한 달을 소모했다. 여기서 또 교훈을 얻었다. ‘흥미로운 문제’에 답을 하려면 그에 맞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질문하고 답하는 능력을 강조하고자 하였고 이것이 교육에 대한 필자의 생각이었다. 그 후 동료 교수들과의 대화, 교육학자들의 주장, 학생들과의 교감 등을 거치며 이 생각은 조금씩 일반화되고 변하였다. 지금 대학교육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학생들이 ‘세계를 보고 인식하는 자신의 틀’을 형성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전세상이 아니고 우주는 어마어마하게 커서 우주크기에 비해 지구는 티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인식하는 고유의 방식을 갖는다. 대학이 이런 다양한 세계관을 갖는 사람들을 배출하고 이들이 협력할 때 우리에게 부닥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세계관의 형성은 끊임없는 자기 자신의 문제를 만들고 이에 답을 할 수 있는 능력의 배양으로만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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