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 상태에서 초속 3억 km의 직선 방향으로 뻗어나가던 빛이 운동장 트랙을 돌듯이 뱅글뱅글 회전하면 어떻게 될까. 뻗어나가는 빛을 제어하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축소돼 작은 면적 안에서도 최대 규모 수준의 회로를 집적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대학 전자전기컴퓨터공학부 박현희 교수가 주도하고 서울대학교 전기정보공학부 박남규 교수와 유선규 교수가 참여한 공동 연구팀은 빛을 이용한 연산 회로 집적화에 성공했다. 시간축을 따라 연산하는 빛을 통해 연산 회로에서 ‘전자’가 수행하던 기능을 ‘광자’가 대신 수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반도체의 구성. 웨이퍼 안에 집적회로 칩이 있고 집적회로 칩은 회로소자로 구성된다. (출처: 삼성반도체이야기)
▲ 반도체의 구성. 웨이퍼 안에 집적회로 칩이 있고 집적회로 칩은 회로소자로 구성된다. (출처: 삼성반도체이야기)

해당 연구는 지난 5일 물리학 분야의 최고 권위를 가진 학술지 『Physical Review Letters』에 게재됐다. 나날이 발전하는 컴퓨터 하드웨어 기술에서 전자를 넘어 광자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빛으로 연산하는 회로’를 알아봤다.

물리적 한계에 부딪혔던 회로

흔히 반도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동그란 판을 웨이퍼라고 부른다. 웨이퍼는 트랜지스터, 저항기 등의 소자들이 결합한 집적 회로로 구성돼 있다. 1947년 벨연구소가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이후 반도체는 컴퓨터, 휴대전화 등 다양한 제품에 사용되며 놀라운 속도로 발전해 왔다. 1965년 반도체 설계와 제조 회사인 미국 인텔의 공동창립자 고든 무어는 18개월에서 24개월마다 반도체 칩에 저장할 수 있는 데이터 분량이 두 배씩 증가할 것이라는 ‘무어의 법칙’을 예고했다. 

무어의 법칙대로 약 50년간 컴퓨터 처리 속도는 빨라지고 메모리양이 증가하는 대신 비용은 상대적으로 감소했다. 그러나 지난 2016년 인텔이 칩의 트랜지스터 증가 주기가 3년으로 느려질 것이라고 발표함으로써 무어의 법칙이 깨지며 고전적 반도체 개발은 한계를 맞게 됐다.

고전적 반도체 개발에서 무어의 법칙이 깨진 이유 중 하나는 전자로 작동하는 전력반도체의 공정 기술 한계 문제다. 반도체의 크기는 점점 더 작아지는 전자기기에 따라 함께 줄어들었다. 그러나 반도체의 면적이 작아져도 그 안에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소자를 넣어야 반도체 성능을 높일 수 있다. 

특히나 반도체 성능과 직결되는 트랜지스터를 동일한 면적에 더 많이 넣을수록 반도체 성능이 높아진다. 반도체 업체들은 미세한 조절을 통해 트랜지스터를 넣기 위한 나노 공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트랜지스터 사이의 거리가 좁아질수록 전류 누설 등의 간섭이 발생하는 제조 오류 문제가 발생했다. 전력반도체의 출력밀도가 향상해 나타나는 발열 문제도 나노 공정의 방해물이다.

이러한 전력반도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자 기반의 회로를 대신하는 ‘프로그래밍 가능한 광자회로’(Programmable Photonic Circuits)(이하 PPC)가 제시됐다. 광자는 빛의 입자성 측면에서 빛을 구성하는 단위 입자다. 전자의 흐름이 전류가 되는 것처럼 광자의 흐름이 곧 빛이 된다. 전력반도체에서 전자가 수행하던 기능을 광자가 대신 수행해 빛으로 정보를 처리하게 만든다. 빛은 에너지 손실이 적고 초고속으로 동작할 수 있어 고효율로 연산 가능하다는 장점도 가지고 있다.

PPC를 통해 전자가 가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한계도 존재한다. PPC에서 연산을 수행하기 위한 회로의 크기가 커야 하고 필요한 소자의 수도 막대하다는 점이다. 공간축을 따라 움직이는 빛은 연산하는 동안 시속 3억 km의 속도로 계속 이동한다. 계속해서 이동하는 빛을 연산하기 위해서는 회로의 크기가 매우 커야만 한다. 또한 PPC의 기본 단위 연산을 수행하기 위한 광자 게이트의 개수는 채널 개수의 제곱에 비례해 증가한다.

시간축을 기준으로 회전하는 빛

PPC가 가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박현희 교수는 빛의 공간축을 시간축으로 전환해 연산에 필요한 빛의 상태를 대체했다. 광자는 파동성을 가지고 있어 빛 역시 입자성과 파동성을 띤다. 파동성은 간섭 현상을 초래할 수 있기에 빛을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도파’를 수행하기 위한 ‘도파로’가 필요하다. 

빛이 도파로에서 공간축을 따라 흐를 때 도파로의 위치에 따른 굴절률을 바꿔 연산했던 방식을, 빛을 가두는 소자인 공진기에 갇힌 빛이 시간축을 따라 연산하는 방식으로 바꿨다. 이는 빛이 매질에 따라 다른 운동량과 속도를 가지는 성질을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시간에 따라 공진기의 굴절률을 바꾸면 빛 또한 공진기를 돌며 상태가 바뀜으로써 연산이 가능해진다. 

박 교수는 이것을 ‘시간에 따라 프로그래밍 가능한 광자회로’(Programmable Photonic Time Circuits)(이하 PPTC)라고 명명했다. 빛이 제자리를 돌게 만드는 공진기를 구현하기 위해 박 교수는 ‘속삭임의 회랑 모드’(whispering gallery mode)원리를 사용했다. 

옆 사람이 속삭인 소리가 돔 벽면을 따라 멀리 떨어진 곳까지 들리는 회랑에서 유래한 속삭임의 회랑 모드는 빛에서도 동일하게 작동한다. 원형의 공진기 안에서 경계면을 따라 전반사에 의해 빛이 오랜 시간 갇히는 공진 현상이 발생하는 원리를 이용했다. 

광자회로에 빛을 입사시키면 회로 내에서 연산 기능이 수행된 후 연산을 마친 빛을 측정한다. 빛의 출력신호는 센서나 디텍터에서 측정한다. 입력신호를 연산한 후 출력신호를 얻어내는 연산을 빛이 수행하는 것이다.

PPTC는 PPC와 달리 빛이 공간상에서 전파되지 않고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연산하기 때문에 필요한 회로의 크기가 크게 줄어든다. 또한 제자리에서 연산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에 소자를 재활용하는 효과가 발생해 필요한 소자의 수도 줄어든다. PPC에서는 채널의 수의 제곱에 비례해 필요했던 소자의 크기와 개수가 PPTC에서는 채널의 수에만 비례하게 된다. 

제자리에서 연산하니 빛이 같은 자리에서 정보를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PPTC는 공진기들을 적절하게 조합해 구성함으로써 빛을 이용한 AI와 양자컴퓨팅에 필요한 모든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이 가능할 것이란 전망이다.

AI부터 광자컴퓨터까지, 빛이 그려낼 미래 기술

전력반도체가 탑재된 전자컴퓨터에 고전컴퓨터와 양자컴퓨터가 있는 것처럼 광반도체가 탑재된 광자컴퓨터도 고전컴퓨터와 양자컴퓨터가 있다. 박현희 교수는 “이번 연구는 인공지능(AI)뿐만 아니라 양자컴퓨터에서까지 활용될 수 있는 빛으로 동작하는 회로 부분을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챗GPT 등장 이후로 대중의 관심을 받으며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AI는 고전 물리에 기반한 연산을 수행한다. 특히나 기존 직렬 방식으로 데이터를 처리하던 컴퓨터 하드웨어 장치인 CPU와 달리 병렬 처리 방식으로 계산을 수행할 수 있는 GPU가 AI 분야에서 중요해졌다. GPU는 AI 반도체 중 하나로, AI 반도체는 인간의 뇌신경구조를 반도체 소자 집적회로 기술 기반 하드웨어로 모방하는 뉴로모픽으로 이어진다. 최근 연구되는 AI 연산은 각각의 인공신경망 뉴런에서 정보를 처리하고, 이를 인공 시냅스를 통해 연계하여 추론, 분류, 결정 기능 등을 수행하게 하는 방식으로 구현한다. 

하나씩 차례로 계산을 수행하던 직렬 방식에서 한 번에 데이터를 처리하는 병렬 방식이 사용되며 훨씬 빠른 속도로 대용량의 연산이 가능하다. GPU에 광자회로가 적용되면 적은 에너지 손실로 고효율 연산이 가능한 장점이 극대화된다. 광자회로로 구현할 때 PPC에서 각 도파로들이 수행하던 기능을 PPTC에서는 각 공진기들이 인공신경망 뉴런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양자컴퓨터는 중첩이나 양자 간섭과 같은 양자역학적 효과를 활용해 기존 컴퓨터보다 빠르게 연산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양자컴퓨터는 △양자 광원 △양자 회로 △양자 측정 과정 △양자 알고리즘이 필요하다. 이번 연구를 통해 양자 회로 부분이 구현됐으며 박 교수는 “향후 양자 광원 및 양자 측정 과정과 연계해 양자컴퓨터 연구로 확장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박 교수의 파동 공학 연구실의 주요 연구 분야는 △광자 기반 컴퓨팅 △양자 기술 △나노 광학 △메타물질이다. 소자가 집적화됨에 따라 발생하는 처리 속도의 한계와 높은 에너지 소비, 발열 및 원치 않는 양자 효과 등의 전자 플랫폼 발전의 물리적 한계를 광자 플랫폼으로 극복하려고 시도한다. 

박 교수는 “파동 공학 연구실에서는 매우 넓은 대역폭, 빠른 전파 속도, 안정된 양자 상태와 같은 빛의 특성을 활용해 전자 플랫폼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며 “빛으로 동작하는 뉴로모픽 컴퓨팅과 양자 컴퓨팅을 구현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전했다.


*집적화: 기능의 직접 연결을 위해 구성 부품을 하나의 단위 상태로 결합해 회로 등을 만드는 것


전혜원 기자 
plohw061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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