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문대학 졸업생들의 취업 문제가 대학 구조개혁의 최대 관심사로 거론되고 있는 가운데, 인문학이 어떤 의미에서건 사회의 요구에 부응하여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각 대학의 중국어 관련 학과들은 다행히도 중국의 부상에 힘입어 지역학으로의 전환이라는 설득력 있는 카드를 손에 들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무척 곤란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다. 그런 실용적인 지역학이 과연 인문학인가 하는 물음이다. 사실 나도 수업시간에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북돋우기 위해 지금 공부하는 내용이 중국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취업을 하거나 직장생활을 하는 데도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를 강조하곤 한다. 하지만 뒤돌아서서 과연 그런 실용성이 수업의 궁극적 목적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도 사실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지역학과 인문학의 본래의 정의를 되짚어 보는 것은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필요하다면 새로운 정의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지역학이더라도 어찌됐든 ‘인문학’이어야 한다는 것은 20세기적 학문분과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고리타분함일 수도 있고 내 나름의 고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때의 ‘인문학’은 문학, 역사, 철학 이외의 분야를 배제한다는 소극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런 것은 꼭 해야 한다는 적극적인 의미이다. 즉,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한 고민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민은 사람은 먹어야 산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근대 중국을 대표하는 지성 루쉰(1881-1936)이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에게서 보았던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루쉰은 1923년 베이징의 한 여자대학에서의 강연에서, 자신이 남편의 인형에 불과했음을 깨달은 노라가 가정을 떠난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를 묻는다. 그는 노라에게는 타락하거나 다시 돌아오는 길밖에 없었을 것이며,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손가방에 돈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만약 돈은 비천한 것이라고 말하는 고상한 군자가 있다면 그를 하루 정도 굶긴 다음에 다시 무슨 말을 하는지를 들어보아야 한다고 일갈한다. 이어서 루쉰은, 사람은 항상 배가 고파지는 존재이며, 따라서 돈이 반드시 필요하고, 그러므로 경제적 권리를 끈기 있게 요구해야 함을 역설한다. 내가 보기엔 이런 통찰이야말로 인문학의 출발점이다.

인문학은 변해야 한다. 그러나 변화의 관건은 인문학이 돈이 되는 상품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거나 인문대학이 유능한 취업학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배고픔에 대해, 왜 행복하지 못한지에 대해 더욱 더 첨예하게 반응하고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쉰이 노르웨이의 문학작품을 참조했듯, 세계 최대의 인구가 함께 먹고 살 길을 급진적인 방식으로 모색해온 중국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귀중한 참조체계가 될 수 있다. 중국학의 ‘실용성’은 그런 중국의 경험에 대한 진지한 공부의 결과로 따라오는 것이다.


이현정(중국어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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