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공원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내려 오다보면 재봉틀이 돌아가는 소리로 가득한 가파른 골목이 나타난다. 건물 벽에 설치된 파이프에선 연신 뜨거운 김이 뿜어져 나오고, 전봇대 옆 버려진 종량제 봉투에는 천 조각들이 가득하다. 창신동 봉제골목이라고 불리는 종로구 창신동 647번지다.

“무슨 사진을 그렇게 찍어요?” 사진을 찍고 있는데 원단을 가득 싣고 골목을 지나가던 오토바이 기사님이 말을 걸어 왔다. “봉제골목 취재하러 나왔습니다.” “그래요? 수고가 많네.” 기사님은 손에 들린 카메라를 보며 이렇게 봉제골목을 취재하러 오는 사람들이 익숙하다는 듯 웃고는 오토바이 시동을 켜 바쁘게 떠났다.

이곳 창신동 봉제골목에선 반지하, 1층, 2층 상관없이 책상과 재봉틀을 놓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봉제공장이 된다. 일반적인 가정집으로 보이는 건물의 2층에서도 희미한 재봉틀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건물 밖에 걸려있는 건 미용실 간판이지만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면 재봉틀과 원단이 가득한 봉제공장이 펼쳐진다. 창신동 일대에만 영세한 봉제공장이 1000여 군데나 있다. 이곳에서 일하는 종사자들은 3000명이 넘는다.

▲ 사람들의 발길이 줄어든 봉제골목의 오후는 쓸쓸해 보인다.
1970~80년대 청계천 주변의 개발과 함께 청계천 인근에 밀집돼 있던 봉제공장들이 터를 빼앗겼다. 청계천에서 밀려난 봉제공장들은 의류업체들이 입주하기 시작한 동대문 인근에 자리를 잡았고 그렇게 지금의 창신동 봉제골목이 만들어졌다. 00섬유, 00패션, 00사. 오래된 건물에 달린 녹슨 간판에서 지난 세월이 느껴졌다.

봉제골목의 일과는 이른 아침부터 시작됐다. 봉제공장으로 디자이너들의 주문 전화가 걸려오자 재단사들이 천을 자르고 다리기 시작한다. 거리는 원단을 배달하는 오토바이로 분주해졌다. 골목을 다니다 보니 어느새 의류자재를 실은 오토바이보다 철가방을 실은 오토바이들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11시 30분. 봉제골목 사람들이 이른 점심을 먹는다. 점심식사 이후에도 바쁜 일과가 이어진다.

한때 봉제공장이 3000여개나 있을 정도로 활발했던 창신동 봉제골목 분위기는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다. 섬유산업이 첨단화되면서 수작업 위주인 창신동의 봉제 산업이 설자리를 점점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봉제인력의 유입이 적어 마을이 고령화되는 것 역시 창신동이 활기를 잃어가는 이유 중 하나다.

복잡한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니 가벽에 둘러싸인 공터가 나타났다. 공사 중이라는 커다란 표지판이 세워져있고 공사 부지를 둘러싼 가벽에는 아기자기한 그림들과 함께 봉제박물관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서울시가 봉제골목을 활성화하기 위해 설립 중인 봉제박물관이다. 서울시는 죽어가는 창신동의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2017년까지 봉제 박물관을 세우고 거리를 정비해 관광자원화 할 계획이다. 봉제골목 사람들은 이와 같은 정책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서울의류봉제협동조합 이관재 사무장은 서울시의 마을재생 사업 추진 발표가 있고도 봉제골목 사람들의 삶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 사무장은 “오래도록 지속돼 온 봉제골목 사람들의 삶이 박물관 하나 새롭게 세워진다고 갑자기 변하기는 힘들다”며 “박물관을 세우고 거리를 정비하는 것보다는 봉제 산업을 장기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언했다.

인건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중국, 동남아 등으로 봉제 산업의 주축이 옮겨가는 추세 속에서 우리나라의 봉제 산업이 과거처럼 다시 부흥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창신동 봉제골목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또한 제2의 이상봉을 꿈꾸는 젊은 디자이너들은 여전히 동대문을 찾고 있다. 지금도 봉제골목의 24시간은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창신동 봉제골목이 젊은 디자이너들과 함께 재도약할 수 있기를 바란다.


글·사진_ 김수빈 수습기자 vincent0805@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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