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블랙버드>

▲ 연극 ‘블랙버드’ 포스터
인간의 기억과 감정은 얼마나 정확할까. 연극 ‘블랙버드’는 복잡하고도 심오한 질문을 단순한 연출을 통해 제시한다. 단조롭고 좁은 사무실 안은 극이 진행되는 유일한 장소이다. 복잡한 사연을 가진 두 인물들이 오로지 대사를 통해 각자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상처들을 드러낸다. 관객들은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듣고 그들의 관계를 정의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저들의 기억은 진실된 기억일까,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여주인공 우나와 남주인공 피터는 15년 전, 우나가 12살이고 피터가 40살 때 성관계를 가진 사이이다. 그 일은 결국 세간에 알려져 피터는 6년 형을 선고받고, 우나는 가족과 이웃들의 낙인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상처로 얼룩진 두 인물은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다 20여 년 후 우나가 피터를 찾아가게 되면서 재회하게 된다.

극은 우나의 주도로 진행된다. 성인이 된 우나는 피터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서가 아니라 소아성애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접근했을 것이라는 생각에 상처를 받고 그 의혹을 풀고 싶어한다. 우나는 피터가 성관계 직후 홀연히 사라져 버린 이유에 대해 피터로부터 직접 듣고자 한다. 우나는 방어적으로 피터를 비웃고 조롱하고 비난하면서도 피터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말해주기를 기다린다. 반면 피터는 소극적이다. 자신의 과거와 우나를 외면하려 한다. 피터는 회피하고 저항하다 결국 자신의 기억과 감정들을 내뱉는다. 피터는 자신이 소아성애자가 아니며 ‘당시 12살 소녀였지만 그 누구보다 성숙했던’ 우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주장한다.

▲ 우나와 피터가 설전을 벌이고 있다.
‘현재’로 고정된 시간에서 과거의 사건은 오롯이 두 사람의 기억에 의존해 그려진다. 등장인물 각각이 설명하는 사건은 상반되기도 한다. 처음으로 함께 손을 잡은 날이 언제였는지, 특별한 날 어떤 옷을 입었는지에 대해 피터와 우나는 각각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 인물들은 진실이라는 이름하에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얘기하지만 그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과거의 ‘사건’은 회상의 주체에 따라 선악과 강자와 약자가 달라진다.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관객들은 사건의 전말에 대한 실마리를 알아가면서도 등장인물의 의중을 더욱 더 의심하게 된다. 

피터와 우나의 긴 회상과 설전 끝에 두 인물의 관계는 잠시 소강상태를 맞는다. 유약하고 순진한 우나는 이내 피터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고, 피터는 우나에게 사랑을 속삭인다. 그러나 이 소강상태는 피터에게 현 애인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로 인해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전화가 끊어지고 피터와 우나가 방안에서 우왕좌왕 하고 있을 때, 한 여자아이와 성인여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여자아이와 성인여자 중 피터의 애인은 누구일까. 피터와 우나의 사랑에 대한 진실에 대해서는 관객도, 등장인물도 그 해답을 얻지 못한 채 끝이 난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피터는 또다시 홀연히 사라지고, 우나가 잠시나마 진실이라고 느꼈던 것들 역시 모두 사라진다.

 


박소정 기자 cheers710@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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