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은 19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김 약국 일가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룬 소설이다. 김 약국은 어릴적 폭력적인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살로 인해 트라우마를 얻게 된 인물이다. 마을 사람들은 김 약국의 집안을 저주받은 집안이라고 낙인찍는다. 그는 말수가 적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남들에게 맡기기만 하는 무기력한 인물이다. 그의 딸들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성격상의 문제를 가진다. 딸들은 아버지와 마을의 낙인 속에서 자라오면서 심리적인 문제 즉, 트라우마가 생긴 것이다.

트라우마는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뿐만 아니라 민족, 국가의 차원에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강점기와 6·25, 독재정권 등의 사건들에 의해 트라우마를 겪기도 했다. 이 상처는 후손들에게도 전달됐다. 월드컵에서 한·일전이 치뤄질 때, 이길 경우 여느 때보다도 열렬히 환호하지만 지게 되면 심리적인 굴욕감을 느낀다. 이것도 일제강점기의 트라우마가 영향을 미쳐 내려온 것이다. 트라우마란 무엇일까. 트라우마는 그 후손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 EMDR의 원리. 눈 앞에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면 기억을 재조합할 수 있다고 한다.
떨칠 수 없는 정신적 상처, 트라우마

트라우마는 정신적 외상을 의미한다. 이 외상은 이후 기억 속에 남아 극심한 스트레스를 유발하게 되는데, 이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이하 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고 부르며 만성 불안과 불면증, 공황상태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트라우마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거나 엄청난 스트레스를 직접적으로 겪은 경우에 나타나기 쉽다. 또한 가족 같이 친밀한 관계의 인간의 죽음을 보거나, 사건 현장에 투입돼 사건의 잔혹함을 직접적으로 접하는 소방관이나 경찰의 경우에도 나타난다.

9·11 테러, 홀로코스트 등의 국가, 민족 단위에서 일어난 참담한 사건에서도 집단적으로 우울, 슬픔, 불안 등의 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나타난다. 또한 이는 직접 겪지 않는 후손들에게도 환경적 요인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의 PTSD 증세로 인해 그의 자식도 불안정한 가정에 노출된다. 하지만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트라우마 현상을 PTSD로 보느냐 마느냐에는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고 한다. 상담 심리를 전공한 교육대학원 신윤정 교수는 “9·11 테러 직후 미국 전반에서 극심한 우울과 불안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급증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를 PTSD라고 진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며 “PTSD는 정신병적 반응을 보여야 하지만 불안 및 슬픔이 병적으로까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사회심리학자 및 일부 심리학자들은 트라우마를 조금 더 넓은 개념으로 이해하려 하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집단 트라우마나 어린 시절 놀림을 받은 기억으로 불안 증세를 보이는 것까지도 트라우마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트라우마가 성립이 되는 것이다.

▲ 9·11 테러 당시 소방관의 모습. 소방관이나 경찰은 참담한 현장을 그대로 목격하기 때문에 PTSD가 나타날 확률이 높다.
부모의 트라우마는 자녀에게 이어진다

그런데 트라우마가 대물림돼 나타난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에서 트라우마의 유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뉴욕 마운트시나이 의과대학 정신의학과 레이첼 예후다 연구팀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그 후손들의 ‘코스티솔 수치’가 낮음을 밝혀냈다. 코르티솔은 트라우마를 경험한 뒤 우리 몸이 정상으로 돌아가도록 도와주는 스트레스와 관련된 호르몬이다. 코르티솔 수치가 낮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후손은 PTSD를 겪을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이다. 신 교수는 “PTSD는 스트레스를 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발병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대인의 자녀들은 홀로코스트를 겪지 않았지만 겪은 것과 유사한 감정을 공유했고 그것이 트라우마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신 교수는 “트라우마를 가진 부모의 슬하에서 자란 자녀들은 부모가 유독 금기시하는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대물림 현상도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부모의 교육 형태가 트라우마에 의해 편향되게 나타난다면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불안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트라우마가 유전된다는 것은 ‘후성유전학’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후성유전학은 특정 상황에서 발현되지 않던 유전자가 발현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DNA에서 외모나 골격 등을 결정하는 유전자는 전체의 2%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98%의 DNA는 감정, 행동, 성격에 영향을 미치는 ‘비부호화 DNA’다. 이 비부호화 DNA에는 스트레스와 트라우마에 관련된 DNA도 존재한다. 이 DNA는 부모로부터 유전되면 유사한 상황에서 발현된다. 9·11 테러 당시 임신을 한 사람의 자녀는 시끄러운 소음 상황에서도 쉽게 평정심을 잃는다고 한다. 이는 비부호화된 DNA를 물려받은 아이에게도 비슷한 상황에서 유사 트라우마 현상이 발현되는 것이다.

신 교수는 “사실 ‘유전’이라는 표현으로 확언하기는 힘들다. 스트레스에는 환경적 요인을 무시할 수 없으며 자녀가 부모의 트라우마를 인지하지 못했다고 해도 부모의 무의식적 행동으로 인해 내재화됐을 수도 있다”며 “다만 부모의 트라우마가 자녀의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복합적인 시각으로 치료법 찾아야

<트라우마는 어떻게 유전되는가>의 저자 마크 월린 교수는 책을 통해 개인의 문제로 조명돼 온 트라우마가 가족, 더 나아가 민족이나 국가 단위에서도 고려함으로써 치료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약물치료나 인지치료로 치료되지 못했던 환자들의 원인을 가족사로 돌려보니 치료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약물이나 인지치료로도 만성 피로 및 불면증 증상을 치료하지 못했던 환자의 가족 중 홀로코스트로 인해 할머니의 가족들이 불에 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 환자는 ‘증발’, ‘소각’이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내뱉고 있었는데 이는 조부모의 트라우마가 부모 그리고 손주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에 따라 가족치료와 언어치료를 병행함으로써 정신병이 해소됐다. 이처럼 트라우마가 다음 세대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은 심리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됐다.

트라우마 및 PTSD는 가족 치료, 인지 치료, 약물 치료로도 치료가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 안구운동 민감 소실 및 재처리(이하 EMDR: Eye Movement Desensitization Reprocessing)라는 치료가 학계에서 가장 많은 효과를 검증받았다고 한다. EMDR은 환자로 하여금 눈동자를 빠르게 좌우로 움직이게 해 REM 수면과 유사한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잠을 잘 때 눈을 좌우로 빠르게 움직여 스트레스와 경험들을 처리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로 인해 필요한 기억을 저장하고 불필요한 기억을 정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PTSD를 겪고 있는 사람들은 기억과 감정의 경험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증상도 갖고 있기 때문에 EMDR로 유사 수면 상태를 만들어 놓고 기억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EMDR을 통해 기억을 정리했다는 경험은 이후에도 비슷한 정서적 경험을 겪었을 때 뇌로 하여금 더 유연하게 사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신윤정 교수는 “EMDR과 언어, 인지, 약물, 가족치료 등을 병행한다면 더 효과적인 PTSD 치료가 가능할 것”이라며 “복합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승인 기자 qkznlqjffp44@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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